3. 북한산성의 역사 - 축성과정


당시 숙종대에는 한양도성에 대한 보수, 남한산성의 동장대 앞 외성 축성 등 다양한 축성 사업이 이어졌다. 한양도성의 여러부분에 숙종대 축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다. 북한산성은 이런 다양한 축성경험이 축적되어서 인지 공사관리를 잘해서인지 정확히는 파악이 안되나 단 6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 한다. 물론 애초부터 북한산의 입지에 의하여 축성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되어 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 된다. 각 지역에 동시 다발적으로 공사를 하여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한양도성의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 안내 - 한양도성 낙산구간 한양도성은 여러차래 축성과 보수를 거친다. 주로 4차례의 공사가 있는데 숙종때 공사가 그중 큰 부분이다.




낙산에서 남삼으로 가는 한양도성의 성곽에서 세종대 축성과 숙종대 축성을 비교래볼 수 있는 구간이다. 



숙종대와 세종대의 축성형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서울 성곽의 모습, 좌측이 세종대 우측이 숙종대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리는 남한산성처럼 승병에게 맡겨 졌는데 이는 숙종 대에 남인인 윤휴가 북벌론을 꺼내 들면서 주장한 바도 있거니와 임진왜란 이후 승병이 조직화 될 수 있는 상황을 본 정부 입장에서는 승병을 아예 조직화 해서 정규 군인화 하고 산성 등에 배치 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용한 정책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워낙 사찰이 조선시대에 산중에 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산성 축조에는 아주 적합한 인력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어느정도 인정해 주는 듯 하지만 결국 모자란 군역의 인원에 대해 승려들을 동원해서 채우는 효과도 있었으리라.

북한산성은 엄밀히 봐서 3단계의 공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본성의 공사로 1711년 2월에 앞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왕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같은해 4월 3일 공사를 시작해서 9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37년 10월19일에 북한성 역사를 마치다라고 하며 성곽의 개요와 들어간 비용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상봉에서 가사당암문 쪽으로 가는 중간의 북한산성

두번째 행궁의 조성으로 1711년 본성의 공사가 완료되기 직전인 8월에 담당관리를 지정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원래 내전의 완공은 10월, 외전은 이듬해 2월에 마치려고 하였으나 날씨등의 문제로 모든 공사는 1712년 5월에 가서야 완성된다. 아마도 숙종이 행차했을 당시는 내저과 외전의 일부만 공사가 완료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진


북한 산성 행궁의 옛날 사진은 노란잠수함님의 블로그에서 많이 볼수 있다. 


세번째 공사에 해당하는 것은 먼저 본성을 완공한 뒤 숙종은 직접 시찰을 하고 나서 있는데 숙종은 공사 완공 이후 세자 영잉군(이후 영조)와 함께 북한산성에 오르면서 전시 통로인 대성문으로 가지 않고 대서문으로 돌아서 들어간다. 물론 전시가 아니니 굳이 고생스러운 길을 나이많은 숙종이 갈필요가 없었고 아울러 민정을 살피면서 가기 위함 이었을 것이다. 이때 대서문을 지나 시단봉에 올라보고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51권, 1712년 4월 10일) 실제로도 북한산성 오르는 길중 대서문에서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가 가장 편안한 산길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아마도 내부 길들이 정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중성문과 아래의 수문은 이렇게 하여 1714년 중성문이 완성된다.


중성문 사진




아울러 북한산성의 본성은 아니지만 북한산성의 축조와 탕춘대성의 축조는 사실상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숙종 41년에 상신 이유에 의하여 북한산에 대해 조치할 일들을 올리는데 그 중에 탕춘대성의 조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략)

그는 아울러 다음과 같이 탕춘대성의 축조를 청하였다. 

 "탕춘대가 있는 지역도 역시 천연의 요새지입니다. 전에는 도성의 엣 성첩이 있었고, 후에 다시 북한산성이 새로이 쌓았는데, 지금은 수문 역사가 완전히 끝나서 허술할 우려가 없고 인민들도 편안히 살 생각을 가지게 되어, 단지 외적을 막을 수 있는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문에서 서쪽으로 문수봉 앞까지, 또 백악산에서 대성문 밖까지의 지역에 장페물이 없습니다. 만약 지형의 험한 것만 믿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는 만전의 계획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두 방면에 토성을 쌓는다면 적은 공력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백악산의 상황을 살펴보면 북쪽의 대성문 밖 산록까지는 예로부터 소로가 있어,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없이 토사가 흘러내려 언덕이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외면을 따라서 견고하게 토성을 축조하고 토성 안쪽에다 새 흙을 보충하여 그 위에 떼를 입힌뒤에 잡목을 심는다면, 적을 방어하는 대책이 완비될 것이며, 산기슭이 견고해져서 영원히 무너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후략)


국역북한지 42 page, 숙종 41년 을미에 상신(相臣) 이유(李儒)가 북한산에 대해조치할 일들을 전달하다 중에서




탕춘대가 있던 탕춘대터, 새검정 근처에 있다.



처음 북한산을 가기 시작할 때 탕춘대성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로 많이 올라 갔는데 도저히 그 지세와 모양이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북한지에 나와있는 이유의 주장 내용과 고지도를 비교해 보고서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선이 대략적인 탕춘대성, 파란선이 한양도성, 파란색 동그라미는 탕충대 터의 위치이다. 탕춘대성의 우측이 평창동 지역이다.



도성의 둘레와 북한산의 굴레의 양쪽에 토성을 쌓고 그 중간인 평창동 지대에 곡식창고를 두면 도성에서 북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주트가 보호가 됨은 불론 평창의 곡식을 북한산성내로 옮기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기리고 임금은 탕춘대성과 북한산 형제봉에서 북악으로 연결되는 산사이의 길을 따라 안전하게 대성문쪽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을 출구로 해서 인왕산에서 자락에서 탕춘대성이 시작해서 비봉으로 연결되는 형세를 가지게 된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가적인 주변 시스템의 정비가 끝남으로서 북한산성이 완전히 정비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얼마되지 않아 숙종사후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고 이 이후 한양의 방위 정책이 산성방수체제에서 도성수호체제 변경되면서 북한 산성의 중요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형제봉 능선에는 산성이 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지의 저자인 성능도 이부분에 대해서 북한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북한산성의 축성은 숙종 때에 시작되었으며 만세를 염두에 둔 심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축성한 이후에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곧 아무도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 당시 재상들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계획하고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즉 지난 날의 공훈도 모두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국역 북한지 66page(1745년)


성능이 부간지를 기록한 것이 1745년이니 이미 이때는 숙종이 죽은지 25년 이후였고 때는 영조 때였다. 이미 많은 저간의 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숙종대 상평통보의 유통과 더불어 대동법, 고립제(삯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제도)의 시행과 유이민의 대책의 변화 등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양의 영향권도 한강변까지 미쳤고 인구도 20~30만으로 늘어났다. 초기 10만 정도 산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 불가능해 져버렸다. 아울러 경제가 강해질수록 있는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짐은 물론이다. 여기에 영조대에 왕의 정통성 시비로 인해 발발한 이인좌의 난을 겪으면서 영조가 절대 수도를 버리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도성 사수론이 강화되게 되었다. 물론 임금의 보장처 개념이 사라진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책 변화로 인하여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후의 도성주변의 방위는 북쪽의 개성유수부, 서쪽의 강화유수부, 동쪽의 광주유수부, 남쪽의 수원유수부가 수도권 외곽을 담당하고, 도성의 외곽은 북한산성의 총융청(탕춘대성에 주둔), 남한산성의 수어청으로 도성 외곽을 방어하며 도성내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도성 내부를 담당하게 되어 조선 후기까지의 군사 체제가 정조대에 완비된다. 


(계속)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3 - 대서문~대남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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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의 총 길이는 5.4km 정도의 길이로 대략 3시간 정도의 코스이다. 코스 중간에 남산을 올라가는 길이 있어서 낙산 코스보다는 힘이 드는 코스지만 남산 자체가 그리 높은 산이 아니라서 땀을 조금 흘리는 정도의 길이라 돌아 보기 매우 좋은 코스이다. 


동행간에 일정으로 정리한 것은 아침에 출발하여 남산에서 커피 한잔 하고 내려와서 남대문에서 갈치 조림으로 점심하고 마무리 하기로 했다. 



이번 남산 코스 순성의 실제 코스는 다음과 같다. 


등산/하이킹
2017. 2. 25. 9:42 AM
소요 시간 2h 33m 49s , 거리 5.9 km
난이도는 높지 않으나 남산 올라갈때 조금 치고 올라 가는 길이 있고 날씨가 맑은 날에 서울시 거의 대부분을 조망 할 수 있는 좋은 코스
-작성자 black207, 출처 램블러
한양 도성길 남산 코스, 동대문 역에서 시작해서 광희문, 남산, 숭례문으로 가는 길

그래프에서 처럼 남산을 올라 갈때와 내려올때 잠시 경사를 경험하게 될 뿐 전만적으로 평탄하다. 




서울 성곽길 남산 구간의 시작은 광희문에서 시작 했고 실질적으로 출발은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역 3번 출구에서 내려서 시작했다. 

흥인지문(동대문),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의 4대문의 사이사이에 있는 4소문인 혜화문(동소문), 광희문(남소문), 소의문(소덕문이로도 불림, 서소문), 창의문(북소문)중의 하나로 남소문에 해당한다. 이 이외에 두개의 수문으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다. 보통 무슨무슨 대문이라고 방향을 붙여서 말하는 명칭은 공식명칭이 아니고 모두 속명이다. 



광희문은 또한 서소문인 소의문과 함께 장례 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쓰였다. 창의문은 실제로 장례 행렬이 지나가기에는 높은 산에 있었고, 혜화문은 숙정문이 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의 상소로 소나무를 심어 폐쇄되면서 혜화문이 실질적인 북문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시체가 드나들수 없었다. 


당시에는 엄청난 원귀가 드나들며 단련된 광희문의 돌은 영험할 것이라며 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된 적도 있다 한다.


이런 광희문은 1975년 새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경향신문 1975년 11월 17일자) 아울러 2014년 2월에 현재 처럼 일반인들이 보기 쉽게 완전 개방되어 편하게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남산 코스는 광희문을 지나서 장충 체육관 사이의 길이 광희문을 지나면 거의 성곽의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다. 



장충체육관 근처에 도착 했다.



길을 건너 조금 올라 가다 보면 성곽 옆길로 올라 가는 계단이 보인다.



성곽을 따라 걸어 올라 간다.



조금 올라 가다 보면 성곽 안쪽으로 들어가는 암문이 나타난다. 



암문으로 들어가 조금 올라 가다 지나온 길을 돌아 보았다.



조금 더 올라 가면 팔각정이 나오는데 이 팔각정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서울 숲으로 내려가는 도심 등산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반얀트리 호텔 쪽을으로 해서 남산으로 올라 가게 된다.



데크를 따라 지나가면 호텔 안을 돌아서 남산으로 올라 가는 길이 나온다.



조금 올라 가면 본격적으로 성곽길에 계단이 나타나고 여기서 부터 정상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다.



성곽중간에 가다 보면 성곽 공사중 구간을 나타내는 듯한 표식이 나온다. 



점점 고도가 올라 간다.



정상 부근으로 가면 이정표가 나오고 계단이 나와 성곽안으로 들어 가게 된다.


계단에서 내려다 보면 동대문 부근의 서울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남산 타워가 한눈에 들어 온다.



길을 따라 더 들어 가면 주차장이 나타나고 뉴스에서 많이 보던 남산 타워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산 팔각정 근처 벤치에서 잠시 쉬면서 커피를 한잔 하고 내려 가는 길로 길을 잡아 남대문 쪽으로 내려 가다 보니 여러군데 자물쇠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내려 가는 길로 내려 간다. 상당히 경사가 급하다. 



내려가는 길에 조망점이 나오는 데 사대문 안의 중심가가 거의 다 보이는 조망점이다. 



각 위치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나와있다.



조금더 내려 가다 보면 용산과 마포쪽이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서울 성곽 복원작업 지점이 나온다. 그런데 사진의 오른쪽이 원래 서울에 있던 일제의 신궁이 있던 터로 밝혀 졌다.



남산 공원 근처에 보면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나오고 유필의 비석이 여러개가 보인다. 다음에 아이들 데리고 한번 와봐도 좋을 듯 하다.



안중근 장군의 유명한 말씀인 견리사의 견위수명의 글귀도 보인다. 



옆으로 돌아 내려 가면 김구 선생의 동상도 보이는데 바로 이자리 근처가 원래 일제의 조선신궁터 였다는 것을 생각 하면 역사란 참 복잡한 것이다 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대문 쪽으로 조성된 성곽을 따라 내려 가면 이번 코스의 끝인 남대문으로 가게 된다. 



남대문 시장안으로 들어 가서 갈치 조림으로 점심을 하기 위해 내려간다.



중앙 식당이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근처에 거의다 갈치 골목이라 할 만큼 다양한 가게가 즐비하다.



갈치 조림이 맛깔 스럽다.



상차림은 아주 단촐 했다.



같이 주문한 삼치 구이도 그저 그만이었다. 



어쨌든 이 것으로 한양 도성 순성 코스는 완성 한 듯하다. 


남산 코스는 


1. 날 맑은날 서울 조망하기 좋은 코스 

2. 남산 올라가는 구간이 운동이 좀 되는 코스 

3. 남대문의 먹거리로서 갈치 조림은 아주 만족... 



한양 도성 순성길(도성내 4개산을 중심으로) 


 악구간(창의문~숙정문~혜화문(4.7km))

낙산구간(혜화문~흥인지문~광희문(2.1km)) 

남산(목멱산)구간(광희문~남산~남대문(4.2km)) 

인왕산구간(숭례문~인왕산~창의문(5.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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