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한산성의 역사 - 축성과정


당시 숙종대에는 한양도성에 대한 보수, 남한산성의 동장대 앞 외성 축성 등 다양한 축성 사업이 이어졌다. 한양도성의 여러부분에 숙종대 축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다. 북한산성은 이런 다양한 축성경험이 축적되어서 인지 공사관리를 잘해서인지 정확히는 파악이 안되나 단 6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 한다. 물론 애초부터 북한산의 입지에 의하여 축성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되어 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 된다. 각 지역에 동시 다발적으로 공사를 하여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한양도성의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 안내 - 한양도성 낙산구간 한양도성은 여러차래 축성과 보수를 거친다. 주로 4차례의 공사가 있는데 숙종때 공사가 그중 큰 부분이다.




낙산에서 남삼으로 가는 한양도성의 성곽에서 세종대 축성과 숙종대 축성을 비교래볼 수 있는 구간이다. 



숙종대와 세종대의 축성형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서울 성곽의 모습, 좌측이 세종대 우측이 숙종대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리는 남한산성처럼 승병에게 맡겨 졌는데 이는 숙종 대에 남인인 윤휴가 북벌론을 꺼내 들면서 주장한 바도 있거니와 임진왜란 이후 승병이 조직화 될 수 있는 상황을 본 정부 입장에서는 승병을 아예 조직화 해서 정규 군인화 하고 산성 등에 배치 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용한 정책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워낙 사찰이 조선시대에 산중에 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산성 축조에는 아주 적합한 인력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어느정도 인정해 주는 듯 하지만 결국 모자란 군역의 인원에 대해 승려들을 동원해서 채우는 효과도 있었으리라.

북한산성은 엄밀히 봐서 3단계의 공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본성의 공사로 1711년 2월에 앞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왕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같은해 4월 3일 공사를 시작해서 9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37년 10월19일에 북한성 역사를 마치다라고 하며 성곽의 개요와 들어간 비용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상봉에서 가사당암문 쪽으로 가는 중간의 북한산성

두번째 행궁의 조성으로 1711년 본성의 공사가 완료되기 직전인 8월에 담당관리를 지정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원래 내전의 완공은 10월, 외전은 이듬해 2월에 마치려고 하였으나 날씨등의 문제로 모든 공사는 1712년 5월에 가서야 완성된다. 아마도 숙종이 행차했을 당시는 내저과 외전의 일부만 공사가 완료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진


북한 산성 행궁의 옛날 사진은 노란잠수함님의 블로그에서 많이 볼수 있다. 


세번째 공사에 해당하는 것은 먼저 본성을 완공한 뒤 숙종은 직접 시찰을 하고 나서 있는데 숙종은 공사 완공 이후 세자 영잉군(이후 영조)와 함께 북한산성에 오르면서 전시 통로인 대성문으로 가지 않고 대서문으로 돌아서 들어간다. 물론 전시가 아니니 굳이 고생스러운 길을 나이많은 숙종이 갈필요가 없었고 아울러 민정을 살피면서 가기 위함 이었을 것이다. 이때 대서문을 지나 시단봉에 올라보고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51권, 1712년 4월 10일) 실제로도 북한산성 오르는 길중 대서문에서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가 가장 편안한 산길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아마도 내부 길들이 정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중성문과 아래의 수문은 이렇게 하여 1714년 중성문이 완성된다.


중성문 사진




아울러 북한산성의 본성은 아니지만 북한산성의 축조와 탕춘대성의 축조는 사실상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숙종 41년에 상신 이유에 의하여 북한산에 대해 조치할 일들을 올리는데 그 중에 탕춘대성의 조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략)

그는 아울러 다음과 같이 탕춘대성의 축조를 청하였다. 

 "탕춘대가 있는 지역도 역시 천연의 요새지입니다. 전에는 도성의 엣 성첩이 있었고, 후에 다시 북한산성이 새로이 쌓았는데, 지금은 수문 역사가 완전히 끝나서 허술할 우려가 없고 인민들도 편안히 살 생각을 가지게 되어, 단지 외적을 막을 수 있는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문에서 서쪽으로 문수봉 앞까지, 또 백악산에서 대성문 밖까지의 지역에 장페물이 없습니다. 만약 지형의 험한 것만 믿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는 만전의 계획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두 방면에 토성을 쌓는다면 적은 공력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백악산의 상황을 살펴보면 북쪽의 대성문 밖 산록까지는 예로부터 소로가 있어,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없이 토사가 흘러내려 언덕이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외면을 따라서 견고하게 토성을 축조하고 토성 안쪽에다 새 흙을 보충하여 그 위에 떼를 입힌뒤에 잡목을 심는다면, 적을 방어하는 대책이 완비될 것이며, 산기슭이 견고해져서 영원히 무너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후략)


국역북한지 42 page, 숙종 41년 을미에 상신(相臣) 이유(李儒)가 북한산에 대해조치할 일들을 전달하다 중에서




탕춘대가 있던 탕춘대터, 새검정 근처에 있다.



처음 북한산을 가기 시작할 때 탕춘대성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로 많이 올라 갔는데 도저히 그 지세와 모양이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북한지에 나와있는 이유의 주장 내용과 고지도를 비교해 보고서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선이 대략적인 탕춘대성, 파란선이 한양도성, 파란색 동그라미는 탕충대 터의 위치이다. 탕춘대성의 우측이 평창동 지역이다.



도성의 둘레와 북한산의 굴레의 양쪽에 토성을 쌓고 그 중간인 평창동 지대에 곡식창고를 두면 도성에서 북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주트가 보호가 됨은 불론 평창의 곡식을 북한산성내로 옮기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기리고 임금은 탕춘대성과 북한산 형제봉에서 북악으로 연결되는 산사이의 길을 따라 안전하게 대성문쪽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을 출구로 해서 인왕산에서 자락에서 탕춘대성이 시작해서 비봉으로 연결되는 형세를 가지게 된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가적인 주변 시스템의 정비가 끝남으로서 북한산성이 완전히 정비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얼마되지 않아 숙종사후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고 이 이후 한양의 방위 정책이 산성방수체제에서 도성수호체제 변경되면서 북한 산성의 중요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형제봉 능선에는 산성이 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지의 저자인 성능도 이부분에 대해서 북한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북한산성의 축성은 숙종 때에 시작되었으며 만세를 염두에 둔 심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축성한 이후에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곧 아무도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 당시 재상들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계획하고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즉 지난 날의 공훈도 모두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국역 북한지 66page(1745년)


성능이 부간지를 기록한 것이 1745년이니 이미 이때는 숙종이 죽은지 25년 이후였고 때는 영조 때였다. 이미 많은 저간의 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숙종대 상평통보의 유통과 더불어 대동법, 고립제(삯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제도)의 시행과 유이민의 대책의 변화 등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양의 영향권도 한강변까지 미쳤고 인구도 20~30만으로 늘어났다. 초기 10만 정도 산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 불가능해 져버렸다. 아울러 경제가 강해질수록 있는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짐은 물론이다. 여기에 영조대에 왕의 정통성 시비로 인해 발발한 이인좌의 난을 겪으면서 영조가 절대 수도를 버리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도성 사수론이 강화되게 되었다. 물론 임금의 보장처 개념이 사라진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책 변화로 인하여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후의 도성주변의 방위는 북쪽의 개성유수부, 서쪽의 강화유수부, 동쪽의 광주유수부, 남쪽의 수원유수부가 수도권 외곽을 담당하고, 도성의 외곽은 북한산성의 총융청(탕춘대성에 주둔), 남한산성의 수어청으로 도성 외곽을 방어하며 도성내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도성 내부를 담당하게 되어 조선 후기까지의 군사 체제가 정조대에 완비된다. 


(계속)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3 - 대서문~대남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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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 도성길 제 2구간으로 불리는 낙산코스는 혜화문에서 시작해서 낙산을 지나 남쪽으로 흥인지문(동대문)을 거쳐 광희문까지의 코스이다. 혜화문에서 흥인지문까지 대략 2.3km, 거기에 흥인지문에서 다시 광희문까지 약 885m 도합 3.2km정도의 코스이다. 코스의 높낮이도 무난하고 주변에 볼거리도 많고 여러모로 걷기 좋은 무난한 코스다.




주된 코스는 낙산구간인데 고려시대에 유우소(乳牛所), 조선시대에 타락색(駝酪色)이라고 하는 왕실 전용 목장이 있어서 여기서 그 이름이 유래 했다고 한다. 지금은 낙산(駱山)의 낙(駱)자가 낙타 낙(駱)자이나 원래는 쇠젖 락(낙, 酪)자 였다고 한다. 타락색은 전용 목장의 이름은 고려시대에 유우소였다가 이후 조선시대에 타락색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 타락색은 궁중의 여러 물건을 관리하던 사복시(司僕寺)아래에서 우유를 조달 했다. 원래 우유는 조선시대에 매우 귀한 음식으로 국왕이라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던 음식이었다. 그 것도 그냥 소주방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내의원에서 직접 찹쌀을 넣어 약으로 끓여서 타락죽을 국왕에게 올렸다 한다. 특별한 날에는 국왕의 하사품으로 신하들에게도 나누어 지곤 했다. 


지금이야 낙농업이 발달하고 다양한 약품과 젓소의 품종등으로 인하여 소가 젓이 많이 나오지 사실 소도 젓은 새끼 먹이는 용도고 옛날의 소들은 그렇게 젓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유는 귀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었으니 왕의 보양을 위한 음식용으로 귀하게 키워서 썼으리라 생각 된다. 오죽하면 영조는 영조 46년에 송아지가 불쌍해서 타락죽 못먹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와 송아지도 놓아 주어 아마 타락색은 그때까지 이 낙산을 지키고 있지 않았을까?  


낙산 코스는 낙산공원으로 인하여 성곽도 잘 정비되어 있고, 걷기도 좋고, 낙산공원과 이화동 벽화마을 그리고 그 끝자락에 동대문 쇼핑 타운등 산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도시적이긴 하지만 걷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코스였다. 아울러 낙산공원 자체는 야경으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서울 야경을 사진으로 찍는 장소로도 알려 져 있다. 마지막으로 동대문의 평양면옥도 걷는 길의 즐거운 기대를 한껏 높여 주었다. 


등산/하이킹
2017. 2. 4. 10:19 AM
소요 시간 1h 57m 51s , 거리 4.3 km
야경도 좋을 듯합니다.
-작성자 black207, 출처 램블러
도성길 따라
트립의 상세 내용을 보려면 http://rblr.co/OVU2 를 클릭하세요.



시작은 이전 코스인 북악 코스의 끝자락인 혜화문에서 시작 했다. 혜화문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렸다. 구름은 끼어 있었지만 걷기는 좋은 날씨 였다. 원래 낙산 자락으로 혜화문 높이까지 산이 있던 부분을 도로를 위해서 깍은 모양이다. 



이전 코스인  혜화문 길건너편에서 계단을 오르면서 코스를 시작 했다. 



계단을 올라 오면 바로 성곽이 시작된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성곽의 축성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볼수 있다. 설명을 보면 이게 축성을 하거나 보수한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의 큰 사각형 돌로 깔끔하게 쌓여진 것은 1800년대 순조 때 축성 된 부분이고, 



사각형으로 고르긴 하지만 순조때 보다 고르지 않고, 돌의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모양이 있는 부분(사진의 중간)은 세종때(1422이후)의 축성 방법입니다.  이보다 더 불규칙 한 방식의 축성 방법은 태조(1396년 이후)의 축성 방법 이라고 합니다. 


서울 성곽 주변에는 축조 시기에 대한 설명 안내판이 여러군데 있습니다. 



낙산 구간은 주변은 전통적인 주택가 옆으로 길이 쭉 나있다.



돌아 본 광경이다. 야경을 촬영하면 매우 아름다울 듯 하다.



처음에 봤을때는 성벽이 하도 깔끔하게 규격화 되어 있고 잘 축조되어 잇어서 현대에 들어와서 개보수 한것으로 알았으나 벽면에 튀어 나와있는 나무 뿌리가 설명하듯이 상당히 오랜기간 이전에 축조된 성벽이다. 



일단 낙산 정상 부근에 도달 했다.



이제 내리막길 시작... 한적하게 산책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조금 내려가다 보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처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여기가 이화동인지 몰랐는데 조금뒤에 안내판에 이화동이라는 것이 보였다. 걷기가 목적이어서 차를 마시지는 않았지만 가볍게 한잔 하면 매우 좋을 듯 했다.



"개뿔"이라는 이름의 커피숖.. 이름이 너무 특이 했다. 



이화동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맑고 따뜻할 때는 쉬어갈 수 있겠으나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화동을 지나 내려고면 두타가 보이면서 코스 끝자락이 보인다. 그런데 그 끝에 한양 도성 박물관이 있었고 한번 둘러 보기로 했다.





도성안에 전시물은 도성의 구성과 특징, 각종 출토 유물과 역사 등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나와있다.



도성이 여러군데가 검토 되었었다고 하는데 계룡산은 알았는데 그이외에도 몇군데가 있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도성 축성 방법을 디오라마로 만들어 놓았는데 건설과정을 이해하기 쉬웠다.



다른 여러가지 전시물들은 천천히 둘러 보아야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 동대문 쪽으로 내려 왔다. 동대문은 문앞에 옹성이 둘러 있는 모양이다. 이문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라이벌인 가토기요마사(加藤清正)를 계략으로 따돌리고 서울에 처음 입성했는데 그때 동대문을 지나 들어왔다 한다. 그런이유 때문에 일제 시대 때 철거하지 않고 놔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대문은 외형적으로 적과의 전투를 잘하기 위해서 성문 앞에 옹성까지 둘러진 견고한 문이지만 결국 전쟁에 승리 하는 것은 성벽이나 무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돌아내려와서 보면 돌위에 다양한 기록이 새겨진 걸 알수 잇다. 공공건축물에 책임을 지기 위한 건설실명제가 이미 이 과거에 조선시대에도 있엇던 것이다. 




동대문 DDP를 돌아서 식사를 하러 갔다. 



도착한 곳은 평양면옥이었다. 평소 너무 진한 국물(다양한 조미료로 만들어졌다 한다.)보다는 좀 심심하지만 과하지 않은 맛으로 된 냉면이 나이가 들수록 입에 맞는 것 같다.







냉면이야 솔직히 1920년대 평양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솔직히 1910년대 부터 이미 MSG를 넣어서 국물을 만드는게 일반 적이었던 음식이라 너무 과하지만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거북해 하지는 않는다. 아지노모도가 1910년에 이미 서울에 대리점을 내고 직접 평양 냉면집을 열기도 했고 면미회라는 조직까지 만들어 판촉에 열을 올렸다 하니 솔직히 그러지 않은 집이 있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 도 든다. (참고 : MSG만 빠지면 음식 정말 괜찮을까)


어쨌든 깔끔한 식사까지 마무리 하고 2코스 낙산 코스를 마무리 했다. 


낙산 코스는 

1. 걷고 놀기 좋은 코스

2. 산이 자신 없거나 나이드신 분들도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코스. 

3. 야경도 유명한 아름다운 코스다. 



한양 도성 순성길(도성내 4개산을 중심으로) 


 악구간(창의문~숙정문~혜화문(4.7km))

낙산구간(혜화문~흥인지문~광희문(2.1km)) 

남산(목멱산)구간(광희문~남산~남대문(4.2km)) 

인왕산구간(숭례문~인왕산~창의문(5.3km)) 






  

다시 열심히 걸어 간다. 이화여고 옆 벽을 따라서 쭉 걸어 간다. 



가다보면 이화100주년 기념관이 나타난다.



조금 더가면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이전에 가본적은 있지만 걷자고 나온길에 조금더 걸으면 어때서 하고 가기로 했다. 



구 러시아 공사관은 구한말 지어진 건물이고 지금은 한국전쟁시에 상당 부분 파괴되고 탑 부분만 남았다. 아관파천때 덕수궁에서 고종이 이곳으로 도망와 있었다고 한다. 정신나간채 외국 세력만 찾는 위정자의 말로의 모습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 된다. 

일제시대인 1925년 부터는 1950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영사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설에는 한국 전쟁중에 북한을 도와준 소련의 영사관이었다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서 파괴되었다는 설도 있다. 확인은 되지 않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일이라 생각 된다. 






러시아 공사관을 뒤로하고 다시 출발... 돈의문터로 간다.



돈의문터는 강북삼성병원 바로 앞이다. 서대문에 길을 확장하기 위하여 일제때 철거되었다고 한다.



서대문에 있는 또하나의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아예 강북 삼성병원 안쪽에 있다.

경교장은 원래 친일 광산업자 최창학이 해방이후에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고자 김구선생에게 빌려 주었던 곳이다. 김구선생이 여기서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역적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 가시고 난뒤에 최창학은 김구선생의 유족에서 경교장 값을 요구하자 김구선생 유족은 이를 최창학에게 반납한다. 그 뒤에 중화민국 대사관저, 베트남 대사관, 그 뒤에 강북 삼성병원이 개원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뀌어 개방되어 있다. 갈길이 바뻐 오늘은 패스.... 아쉽다. 



지나가는 길에 강북 삼성병원앞에 하양도성 스탬프 찍는 곳이다. 반대쪽 동대문에 도성 박물관 가도 스탬프 용지 나누어 준다. 재미삼아 참고 하시길...



삼성병원 옆을 지나가면 아파트 단지(지금은 공사중)이 나오고 다시 이정표가 나타난다.



따라가다 보면 독립문이 나옵니다. 



여기로 바로 오려면 독립문역 3번 출구로 오면 된다. 



행촌권 성곽마을이라는 안내표지판이 있고 여기서 오르막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표지판 바로 뒤로 돌아가면 한양 도성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가에 안전가이드가 보기좋게 안내 하고 있다. 길이 끊어 질때까지 직진... 



오르막의 끝이 보인다. 끝에 조그만한 휴식할 장소가 있다 거기서 커피한잔...



계단이 시작되고 거기에 인왕산 안내도가 붙어 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본격 성곽길 시작...



드디어 성곽길이 시작하면서 인왕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나무 계단 하나를 올라가서 돌아 보면 도성이 남산으로 쭉 뻗어 가는 걸 볼수 있다. 굽이쳐 남산의 오른쪽을 돌아 연결 된다. 



우리는 도성 안쪽 길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단계 또 오르니 인왕산이 한번더 가까워 진다. 



다시 돌아본 올라온길... 점차 고도가 올라가면서 산에 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오르고...



오르고....



돌아보니 서울이 아득해 졌다. 



인왕산의 으낌이 드디어 들기 시작... 범바위를 오른다.



이제 인왕산 건너 홍제동 아파트 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인왕산 주봉이 눈에 들어 온다. 



또 오른다.



그리도 또 오른다.



돌아 보니 왔던 길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같은 날씨에 산에 있다는 건 행복인 듯 하다. 



정상에서 60m 앞...



정상 직전 마지막 이정표...



인왕산 정상에는 정상적이 없다. 이 간판으로 정상석을 대신...



정상 꼭대기 돌위에 있는 지적도 근점 표시...



건너편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풍경... 멀리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왼쪽은 은평구고 그위로 일산 파주 방향이다. 



기차바위 오른쪽 풍경이다. 조금더 오른쪽은 청와대라.. 사진 촬영은 여기까지... 



이제는 하산길...



다시 기차바위를 앵글에 담아 본다.



우리는 창의문(자하문)으로 간다. 



도성 여장 뒤로 북한산 사모바위와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이 눈앞에 펼쳐진다. 



내려가는 길에 계단이 급해서 쉬어가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 있는 이정표 



거의 다 내려왔다.



계단, 계단...



창의문 가까이 와서는 성벽길로 못가고 내려 가야 한다.



나려와 인왕산 길을 건너면 청운문학 도서관 방향으로 가면 창의문이다. 



조그만한 정자뒤에 화장실... 급하다....



윤동주 문학관으로 이제 코스는 끝... 여기서 코스를 종료하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아무거나 타면 모두다 경복궁역으로 간다.



중간에 내려서 주린배를 채우러 가는 길에 나온 안내 표시... 세종대왕 나신 곳이란다.



조금 늦은 점심은 토속촌 삼계탕으로... 중국 관광객들이 버글버글 하신다. 이집.. 노무현대통령이 들러서 식사 하신곳으로 유명하다. 대기업 회장들하고 공식 모임을 아예 여기서 하신적이 있다고... 그뒤에 급격히 유명해진 집이다.



맛은 좋은편... 그렇게 유명해질꺼까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런대로 잘하는 집에 맛있게 먹은건 사실.. 하지만 정신이 좀 없다.



배도 부르고 이걸로 이번주 산행은 끝.... 피곤함이 좋다. 


한양 도성 순성길(도성내 4개산을 중심으로) 


 악구간(창의문~숙정문~혜화문(4.7km))

낙산구간(혜화문~흥인지문~광희문(2.1km)) 

남산(목멱산)구간(광희문~남산~남대문(4.2km)) 

인왕산구간(숭례문~인왕산~창의문(5.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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