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북한산성길


북한산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그 중 등산이 가장 쉬운 코스라고 한다면 다들 북한산성입구에서 대남문으로 올라가는 코스라고들 한다. 이 코스가 숙종이 영잉군(훗날 영조)을 데리고 행궁으로 올 라갔던 길이기도 하다. 보통 코스를 가는 사람들은 불광역이나 연신내 역에서 지하철을 내려서 704번 버스나 다른 여러 버스들을 이용해서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내려서 간다. 이 동네는 은평구 진관동인데 불광역에서 대략 30분 정도 10개 조금 넘는 버스 정거장을 가면 도착한다.


※참고 : 북한산성입구 교통편 

대중교통 : 불광역에서 34번, 704번 약 30~40분 소요 북한산성입구정류소에서 하차 

자 가 용  : 북한산성입구 주차장 이용(성수기 승용차 기준 첫 한시간 1,100원, 이후 10분당 250원, 9시간 이상 13,000원


불광역에서 구파발 방향으로 불광역 2번 출구에서 길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불광역 방향, 불광역 방향으로 버스를 탄다.


당일에는 704번을 타고 버스로 이동했다. 17개 정류장을 지나서 북한산성입구 정류소에서 하차, 우측으로 돌아 북한산성 입구쪽으로 올라 간다. 



도착한 곳은 거의 북한산 등산객을 위한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등산복이니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동네는 원래 북한산 안의 북한 동내에 거주하며 장사를 하고 있던 상가 55가구를 2010년부터 이주 시켜서 조성된 마을이다. 원래 북한동 주민들의 기원은 북한산성북 조성할 때 이곳으로 일거리를 찾아 왔더 주민들이 이후에 북한산성내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분들이 이후 북한산성 권역내에서 식장이나 등산용품 판매등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후 국립공원이 되고 난뒤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북한산동내에서 식당 등을 하고 있는 북한동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 오폐수 방류 등의 문제가 지속되어 마을 주민과 이주 협의를 거쳐 총 이주비 328억원을 지급하고 현재의 위치로 이주 했다고 한다. 그렇게 300여년의 북한동 역사도 새로운 시대로 변해 가고 지금은 그 흔적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깨끗한 자연이 돌아 온 것도 등산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행인 듯 하다.


이주 시작 전후로 모습이 궁금하여 인터넷을 한참 뒤져 보았으나 이주 시작 시점이 2010년 정도라 아직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되기 전이라 동내 사진 등이 인터넷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http://zetham.net/285 참조) 하지만 당시 계곡을 따라 술집들이 즐비 했고 북한산성입구에서 식당까지 미니버스등을 운행 하면서 등산객들의 원성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맑은 공기 마시러온 등산길에서 만난 빵빵거리고 지나가는 각종 차량에 등산객의 원성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조선일보 1997년 9월 9일자 기사를 보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무분별한 차량 출입으로 인한 공원훼손을 막기 위하여” 북한동내 성수기인 7, 8. 10월 및 토/일요일의 출입을 막았다고 하니 이미 오래 전부터 차량 통행이 말썽이었던 것 같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서문이 나온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서쪽 정문이다. 이곳 안쪽이 북한산성 지역이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성문중에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성문이다. 현재의 문루는 1958년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대서문 문루는 일제시대 말기에 파손된채 방치 되어 오던 것을 1958년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698만환을 들여 문루를 복원하고 우마차가 다니던 오솔길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한다. 현재 문루는 최헌길 지사가 당시 일을 적은 북한산성대서문중수기편액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쓴 대서문 현판이 걸려있다. 


대서문의 석조 구조물은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서쪽으로 난 방향에서 바라보면 문의 상당 좌우측에 누혈이라는 빗물 구멍이 나있다. 단순한 구멍도 간단히 만들지 않고 용머리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반대쪽으로 안쪽의 누혈은 모양만 갖춰지고 실제 빗물 구멍은 나있지 않는 모양이다.



또하나의 특징은 북한산의 각 문에 있는 여장은 한개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평여장이다. 보통 여장은 반원형 여장이건 철여장이건 평여장이건 관계없이 대부분 여러개의 돌이나 기와, 혹은 전돌(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북한산성의 각 문위에 있는 여장의 경우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 많이 보인다. 



화성 장안문 철여장수원 장안문의 옹성에 있는 철(凸)형 여장수원 화성 북암문 반원형 여장수원 화성 북암문 반원형 여장


북한산성 대서문안으로 들어서서 조금 가다 보면 잘 가꾸어진 한옥 한채가 보인다. 



2010년 까지만 해도 이주변에 마을이 있고 실제 주민이 거주 했었다고 합니다. 현재 몇채의 전통가옥은 그 혀태를 보존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옥들은 철거된 상태입니다. 원래는 휴게공간이나 공공시설로 쓰려고 하였는데 아직은 아직은 그런 형태로 개발 되지 않은 듯 하다. (참고 : http://blog.daum.net/architect1/12302305 )



조금더 올라가면 무량사라는 절이 나오고 좌측으로 계곡을 넘어 원효봉이 펼쳐진다. 저 원효봉 뒤가 북한산성의 북문이 위치하고 있다. 서문과 동문의 고도 차이는 정말 한참 차이가 난다. 온효봉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것이 북한산의 주봉들이다. 



무량사를 지나 다시 약 4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북한동 역사관이 나오고 좌측으로 보리사가 보이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서 보리사 쪽으로 계속가면 북한산 정상과 백운대로 가는 길이 나오고 가다가 왼쪽으로 꺽으면 우너효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오리는 다리를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길을 따라간다. 북한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파르지 않은 길이 계속된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중성문이 나타난다.



중성문은 북한산성기 2에서 이야기 한것 처엄 북한산성의 축조가 끝난 뒤에 추가로 만들어진 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서문의 누혈과 중성문의 누혈의 묘양이 달랐다. 같이 만들었다면 아무래도 비슷하게 만들어 졌을텐데 중성문의 누혈의 모습은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중성문을 지나서 올라갈수록 점차 가파르지는 않지만 고도가 높아 졌음을 느끼는 것이 갔을때 단풍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순간에 단풍 터널 속으로 들어와버린 산행객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탄성을 내밷었고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뒤 용학사 갈림길 주변으로 예전의 중흥사 권역을 알리는 알림판이 지나고 나고 



북한산의 아름다운정자인 산영루(山映樓)를 만나게 된다. 이름그대로 산이 비치는 누각이란 뜻인데 아마도 산의 모습이 북한천 계곡을 따라 비치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인듯 하다. 


현재의 산영루는 을축년(1924년) 대홍수 때 원래의 누각은 유실되고 2014년에 예전의 기록과 사진등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산영루는 기혹상 1603년 문잉 이정귀가 북한산일대를 유람한뒤에 남긴 기록에 산영루로 내려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북한산성 축조 이전부터 있었던것 같다. 이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등이 다녀갔다 하고 성호 이익 도 산영루를 삼각산 팔경의 하나로 기록했다 한다.



산영루 처마에 걸린 북한산 의상능선의 한자락을 담아 보았다.



위사진과 다른날 산영루앞 계곡 바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산영루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명소임이 티가나는 비석 거리가 있는데 특이한 비석 하나가 눈에 띄인다. 바로 경리청을 담당했던 민영준이라는 자의 비석중 파괴되고 남은 일부가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옆에 문화재를 소개해 주던 분에 말을 귀동냥해보니 명성왕후의 조카였으며 동학혁명에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말아먹은 장본인이며, 그의 아마버 민두호 부터 "민쇠갈구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물불 안가리고 돈만 탐한 일가로 유명하다. 민영휘의 원재 이름은 민영준으로 비석에는 민영준에 준짜가 반쯤 사라져 잇는데 조선 최대의 부호였고 선혜청을 담당하면서 세금 해먹는데 최고 였다고 한다. 

일제에 아부해서 작위를 받았고 그뒤 4대까지 떵떵거리며 사는데 휘문고등학교를 만든사람이라고도 한다. 한국 사학의 문제와 친일의 문제가 어느지점에서 만나는지를 보게해주는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아울러 그 후손중 민대식의 후손이 지금의 남이섬의 소유자 라고 한다. 나는 절대 다시 남이섬에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 남이섬 가서 놀다 왔다는 사람은 손가락질 해주리라...



그럼 왜 세금 도둑은 경리청에 왔을까? 이곳이 상당한 군량을 보관하고 있던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조금더 올라 가면 겅리청에서 관리하던 상창이라는 군량 저장소가 나온다. 여기에 10만명이 먹을 곡식을 준비 하는 것이 계획었고 다시 대남문 아래의 평창에 또 상당량의 군량을 보관하면서 관리했다는게 숙종대의 기록인데 민영휘가 있을때까지도 그런 빼먹을 꺼리가 있어 부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영휘의 비석을 뒤로하고 길을 재촉하면 점차 경사가 조금씩 급해지는 것을 다리에서 느끼게 된다. 



조금더 올라가면 앞에서 말한 경리청 상창지가 나온다. 여기는 식량과 군수품을 보관하던 경리청 상창과 관성소가 있던 곳인데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이 경리청을 두어 관할케 하고 북한산성내에는 그 산하기구로 관성소를 두어 관리케 하였다. 



상창에서 더 올라가면 보국사 절터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이시점 부터는 다양한 유적지에 대한 설명들이 나온다. 



보광사지를 조금 지나 보면 단풍 터널이 나오는데 이지점은 여름에 와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일품 지점이다.



여영청 유영지는 발굴이 한창이라 옆으로 돌아서 올라간다. 





돌아가면 계단이 나타나는데 조금 기울기가 더 급해졌다 싶은 지점이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대남문에 가까워 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남문 직전에 왼쪽으로 돌아서 대남문으로 올라간다. 


대남문은 1990년 복구를 했는데 당시 주요 목재는 헬기로 실어 올리고 기와는 일반 등산객들의 도움으로 한장씩 들어 올려서 진행 하였다.  






성곽위의 여장은 역시나 하나로된 화강암 형태다. 



여장너머 구기동 까지 멀리 보인다. 10월의 단풍이 한참일 때였다. 



원래 대남문은 큰 성문이 아니었다. 이름도 소남문이었고 사진에 보이는 문루도 없었다. 원래 남쪽 방향의 주문은 대성문인데 대성문은 대남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조 36년에 영조가 북한산에 오르면서 융복(군복)을 입고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총융사에게 갑주를 입고 대성문을 나와 대기하게 하였다. 이때는 북한산성에 올라가는 길로 창의문을 나가 대성문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대성문 길이 험하여 대성문 인근에서 내시의 등에 업혀 올라갔다고 한다.  북한산성을 돌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소남문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왕이 지나간 문이라 그대로 둘수가 없어 문루를 올리고 대남문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이길로 영조가 내려간 길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롭긴 하다. 다만 이런 천혜의 요새인 북한산성도 결국 실제로 국난을 막지는 못했고 어찌보면 이런 산성의 존재가 필요하지만 결국 국가를 보위하는 것은 합의된 국민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한다.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2 - 북한산성의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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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한산성의 역사 - 축성과정


당시 숙종대에는 한양도성에 대한 보수, 남한산성의 동장대 앞 외성 축성 등 다양한 축성 사업이 이어졌다. 한양도성의 여러부분에 숙종대 축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다. 북한산성은 이런 다양한 축성경험이 축적되어서 인지 공사관리를 잘해서인지 정확히는 파악이 안되나 단 6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 한다. 물론 애초부터 북한산의 입지에 의하여 축성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되어 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 된다. 각 지역에 동시 다발적으로 공사를 하여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한양도성의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 안내 - 한양도성 낙산구간 한양도성은 여러차래 축성과 보수를 거친다. 주로 4차례의 공사가 있는데 숙종때 공사가 그중 큰 부분이다.




낙산에서 남삼으로 가는 한양도성의 성곽에서 세종대 축성과 숙종대 축성을 비교래볼 수 있는 구간이다. 



숙종대와 세종대의 축성형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서울 성곽의 모습, 좌측이 세종대 우측이 숙종대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리는 남한산성처럼 승병에게 맡겨 졌는데 이는 숙종 대에 남인인 윤휴가 북벌론을 꺼내 들면서 주장한 바도 있거니와 임진왜란 이후 승병이 조직화 될 수 있는 상황을 본 정부 입장에서는 승병을 아예 조직화 해서 정규 군인화 하고 산성 등에 배치 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용한 정책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워낙 사찰이 조선시대에 산중에 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산성 축조에는 아주 적합한 인력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어느정도 인정해 주는 듯 하지만 결국 모자란 군역의 인원에 대해 승려들을 동원해서 채우는 효과도 있었으리라.

북한산성은 엄밀히 봐서 3단계의 공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본성의 공사로 1711년 2월에 앞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왕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같은해 4월 3일 공사를 시작해서 9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37년 10월19일에 북한성 역사를 마치다라고 하며 성곽의 개요와 들어간 비용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상봉에서 가사당암문 쪽으로 가는 중간의 북한산성

두번째 행궁의 조성으로 1711년 본성의 공사가 완료되기 직전인 8월에 담당관리를 지정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원래 내전의 완공은 10월, 외전은 이듬해 2월에 마치려고 하였으나 날씨등의 문제로 모든 공사는 1712년 5월에 가서야 완성된다. 아마도 숙종이 행차했을 당시는 내저과 외전의 일부만 공사가 완료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진


북한 산성 행궁의 옛날 사진은 노란잠수함님의 블로그에서 많이 볼수 있다. 


세번째 공사에 해당하는 것은 먼저 본성을 완공한 뒤 숙종은 직접 시찰을 하고 나서 있는데 숙종은 공사 완공 이후 세자 영잉군(이후 영조)와 함께 북한산성에 오르면서 전시 통로인 대성문으로 가지 않고 대서문으로 돌아서 들어간다. 물론 전시가 아니니 굳이 고생스러운 길을 나이많은 숙종이 갈필요가 없었고 아울러 민정을 살피면서 가기 위함 이었을 것이다. 이때 대서문을 지나 시단봉에 올라보고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51권, 1712년 4월 10일) 실제로도 북한산성 오르는 길중 대서문에서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가 가장 편안한 산길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아마도 내부 길들이 정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중성문과 아래의 수문은 이렇게 하여 1714년 중성문이 완성된다.


중성문 사진




아울러 북한산성의 본성은 아니지만 북한산성의 축조와 탕춘대성의 축조는 사실상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숙종 41년에 상신 이유에 의하여 북한산에 대해 조치할 일들을 올리는데 그 중에 탕춘대성의 조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략)

그는 아울러 다음과 같이 탕춘대성의 축조를 청하였다. 

 "탕춘대가 있는 지역도 역시 천연의 요새지입니다. 전에는 도성의 엣 성첩이 있었고, 후에 다시 북한산성이 새로이 쌓았는데, 지금은 수문 역사가 완전히 끝나서 허술할 우려가 없고 인민들도 편안히 살 생각을 가지게 되어, 단지 외적을 막을 수 있는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문에서 서쪽으로 문수봉 앞까지, 또 백악산에서 대성문 밖까지의 지역에 장페물이 없습니다. 만약 지형의 험한 것만 믿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는 만전의 계획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두 방면에 토성을 쌓는다면 적은 공력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백악산의 상황을 살펴보면 북쪽의 대성문 밖 산록까지는 예로부터 소로가 있어,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없이 토사가 흘러내려 언덕이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외면을 따라서 견고하게 토성을 축조하고 토성 안쪽에다 새 흙을 보충하여 그 위에 떼를 입힌뒤에 잡목을 심는다면, 적을 방어하는 대책이 완비될 것이며, 산기슭이 견고해져서 영원히 무너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후략)


국역북한지 42 page, 숙종 41년 을미에 상신(相臣) 이유(李儒)가 북한산에 대해조치할 일들을 전달하다 중에서




탕춘대가 있던 탕춘대터, 새검정 근처에 있다.



처음 북한산을 가기 시작할 때 탕춘대성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로 많이 올라 갔는데 도저히 그 지세와 모양이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북한지에 나와있는 이유의 주장 내용과 고지도를 비교해 보고서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선이 대략적인 탕춘대성, 파란선이 한양도성, 파란색 동그라미는 탕충대 터의 위치이다. 탕춘대성의 우측이 평창동 지역이다.



도성의 둘레와 북한산의 굴레의 양쪽에 토성을 쌓고 그 중간인 평창동 지대에 곡식창고를 두면 도성에서 북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주트가 보호가 됨은 불론 평창의 곡식을 북한산성내로 옮기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기리고 임금은 탕춘대성과 북한산 형제봉에서 북악으로 연결되는 산사이의 길을 따라 안전하게 대성문쪽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을 출구로 해서 인왕산에서 자락에서 탕춘대성이 시작해서 비봉으로 연결되는 형세를 가지게 된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가적인 주변 시스템의 정비가 끝남으로서 북한산성이 완전히 정비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얼마되지 않아 숙종사후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고 이 이후 한양의 방위 정책이 산성방수체제에서 도성수호체제 변경되면서 북한 산성의 중요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형제봉 능선에는 산성이 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지의 저자인 성능도 이부분에 대해서 북한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북한산성의 축성은 숙종 때에 시작되었으며 만세를 염두에 둔 심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축성한 이후에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곧 아무도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 당시 재상들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계획하고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즉 지난 날의 공훈도 모두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국역 북한지 66page(1745년)


성능이 부간지를 기록한 것이 1745년이니 이미 이때는 숙종이 죽은지 25년 이후였고 때는 영조 때였다. 이미 많은 저간의 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숙종대 상평통보의 유통과 더불어 대동법, 고립제(삯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제도)의 시행과 유이민의 대책의 변화 등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양의 영향권도 한강변까지 미쳤고 인구도 20~30만으로 늘어났다. 초기 10만 정도 산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 불가능해 져버렸다. 아울러 경제가 강해질수록 있는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짐은 물론이다. 여기에 영조대에 왕의 정통성 시비로 인해 발발한 이인좌의 난을 겪으면서 영조가 절대 수도를 버리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도성 사수론이 강화되게 되었다. 물론 임금의 보장처 개념이 사라진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책 변화로 인하여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후의 도성주변의 방위는 북쪽의 개성유수부, 서쪽의 강화유수부, 동쪽의 광주유수부, 남쪽의 수원유수부가 수도권 외곽을 담당하고, 도성의 외곽은 북한산성의 총융청(탕춘대성에 주둔), 남한산성의 수어청으로 도성 외곽을 방어하며 도성내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도성 내부를 담당하게 되어 조선 후기까지의 군사 체제가 정조대에 완비된다. 


(계속)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3 - 대서문~대남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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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산, 그리고 북한산성




지난 두 주 동안 북한산 단풍구경을 잘 다녀왔다. 북한산성을 가겠다고 의식하고 간적은 없으나 북한산을 다니다 보니 북한산성의 존재(그 전에는 남한산성이 있으니 북한산성도 있겠지 수준의 인식이었다.)를 알게 되고 그 험준한 곳에 왜 산성이 들어섰는지, 그리고 한양 도성 순성을 여러번 해본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될 만큼 잘 지어놓은 도성을 놔두고 도성 바로 뒤에 저런 산성을 마련했는지 등이 궁금하게 되었다. 아울러 비봉을 올라가는 길에 탕춘대성 암문을 통과 하면서 도대체가 한양도성과의 관계는 뭐고 탕춘대성은 어디를 둘러 싼 것도 아닌 성이 이렇게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어딘가에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는 곳이 없었다.


탕춘대성 암문둘레길 8-2구간 중의 탕춘대성 암문, 둘레길을 올라가는 길이자 향로봉쪽으로 북한산을 올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탕춘대성 입구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많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유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홍지동(4번지)일대

지정현활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33호


  탕춘대성은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서, 도성과 외곽성(북한산성)의 방어기능을 보완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본래 북한산성을 쌓자마자 탕춘대성을 축성하려 하였으나 곧바로 시작하지 못하고 1718~1719년 두 해에 걸쳐 성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 성을 탕춘대성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연산군의 연회장소인 탕춘대가 지금의 세검정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산봉우리(현재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던 것과 관련이 있으며, 한성의 서쪽에 있가하여 서성(西城)으로도 불렀습니다. 

  인왕산 북동쪽에서 시작한 탕춘대성은 북한산 비봉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고 길이는 약 5.1km에 달합니다. 보현봉~형제봉~북악산을 잇는 능선에도 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숙종의 사망 등 정치적인 이유로 시행하지 못한 체 지금의 성곽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탕춘대성은 조선후기 혼란기 속에서 훼손되고 홍수 등으로 일부 구간이 무너지고 방치되다가 1977년 홍지문과 함께 일부 구간이 복원되고 정비되었습니다.


탕춘대성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설명이 없다보니 위 설명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군량을 저장한다는 건 또 무슨말인지, 그런 중요한 성이 왜 버려졌는지... 그리고 정확한 북한산성과의 관계는 뭔지 등등... 


각 위키를 보면 북한산이 숙종대에 만들어 졌다는 것과 대략적인 역사 그리고 내부 시설이 어떤어떤 것 있는지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왠지 이런 험준한 산지에 성을 쌓았다면 생각 보다 많은 반대가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해야 하는 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리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좀 많은 검색과 관련 문헌의 참조를 했어야 하지만 생각 보다 재미있는 일이었고, 나름 아마추어적인 역사공부의 재미를 볼 수 있는 과정이었다.

 

2. 북한산성의 역사 - 축성의 배경


산행을 마치고 와서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북한산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서 상세한 검색을 해보았다. 인터넷상에는 생각 보다 많은 자료가 있었고 특히 서울역사편찬위원회의 『국역 북한지』는 가장 정확한 사료이며 많은 답을 해주는 내용이었다.(서울역사편찬위원회 국역 북한지는 ebook으로 서비스 되고 있다.)


북한지성능의 북한지, 북한산성 지도가 그려져 있다. 서울시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북한지를 국역하여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북한지는 승려 성능(聖能)1745(을축년) 11월에 북한산성에서 팔도도총섭의 임무를 끝내고 후임도총섭인 서봉(瑞鳳)에게 인계를 위해 판각하여 작성한 내용이며 1711년 북한산성의 축성 이전의 상황부터 북한산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북한산성에 대해서 가장 자세한 내용일 것이다.

 

도총섭(都摠攝)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임명하는 불교승려의 최고직위, 조선초기에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임명한 사례가 별로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승병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국가에서 임명하였다. 북한산성도 성능을 팔도 도총섭으로 하여 축성하였고 남한산성도 마찬가지로 각성이라는 승려가 도총섭으로 책임을 지고 구축 하였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사전 


1) 북한산성의 연혁


북한 산성은 생각 보다 그 연혁이 길다. 이미 온조왕 14(B.C 5, 전한의 애제 건평 2)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뒤에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4대왕 개루왕이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장수왕 침입 때 개로왕이 탈출하다 죽은 뒤 산성을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의 문종이 한양 도성 수비의 단점을 파악하고 도성주변의 축성을 논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대신이 백성을 힘들게 한다고 반대하여 논의만 하였다.(문종 원년 1451) 이후 실제 축성은 숙종에 이르러야 진행 되게 되는데 이것은 병자호란을 통하여 남한산성에서 느꼈던 많은 단점으로 인하여 그 필요성이 대두 되어서였다고 한다. 다른 것 보다 특히 남한산성이 좁아서 내부에 식량 비축이 떨어졌으며 여기에 결정적인 강화도 함락에 따라 패배 한 것으로 인식 되어 새로운 대피처가 필요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북한산성의 축성 논의


북한산 축성에 대한 논의 과정은 길고도 험난하다. 숙종 원년에 논의를 시작해서 무려 36년간이나 다양한 내용을 논의 하면서 산성의 내용을 정해 간다.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1권에 기록에 따르면 숙종원년 11월에 북한산성의 수축을 논의 하는데 윤연혁은 북한산의 산세가 험하고 한쪽으로만 열려 있어 수축 자체의 일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면서 유사시에 임금이 자리를 옮길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남한산성을 왕의 대피처로 보지 않는 듯 한 내용이 있다. 내용상 남한산성은 좁아서 유사시에 청야전술을 하기에는 좁으니 도성에서 가까우면서 지형이 좋은 북한산 주변에 수축하자는 논의가 되고 숙종이 이를 허락한다. 하지만 이후 무려 37년 동안 갑론을박이 펼쳐지는데 결국 숙종 37 2월에 북한산내에 물 부족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숙종이 다들 뜻을 모으기만 기다린다면 어찌 이를 이룰 수 있는 날이 있겠는가?”라며 축성을 밀어 붙인다.


3) 북한산성의 축성이유 및 목적


- 임진왜란의 경험

임진왜란 당시 인조가 의주로 몽진을 하면서 이후 도성이 황폐화 되었고 임금이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왕조에서 국민을 버린 임금이 당연히 격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숙종도 이런 부분을 무겁게 받아 들인 듯 하다. 결국 유사시에 임김이 백성과 함께 항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도성 가까이에 피난처가 필요했다.(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숙종, 영조, 정조가 북한산성에 오른 까닭 참조)


- 병자호란의 경험

북한산성의 기본적인 축성 이유는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의 항전과정의 경험이 가장 주효했다. 인조 때에 이미 북방의 상태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미리 준비 했지만 준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허망하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강화도, 남한산성을 피난처로 쓰는 것 자체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피난처를 새로이 구해야겠다고 생각 한다.


남한산성도 영남대박물관소장남한산성도, 영남대 박물관소장, 우상단의 동문 윗쪽 동장대 앞에 외동장대와 외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대에 벌봉주변에 외성을 쌓고난 뒤의 지도, 원래 남한 산성에는 벌봉주변에 성이 없었는데 청군이 벌봉주변에 홍이포를 끌고와 포를 쏘면서 항전의지에 많은 타격을 주었다 한다.


병자 호란의 경험중 또하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무기의 등장이었다. 홍이포(紅夷砲)의 등장이다. 홍이는 네델런드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중국인 네델런드인과의 전투중에 경험하고 이를 수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명나라에서 홍이포를 제작할 수 있게 된것은 1621년이라고 한다. 

홍이포는 컬버린(Culverin)의 일종으로 직사형의 대포이고 철환(쇠공)을 넣어 공성전용으로 사용하는 대포이다. 성광에다가 직접 쏴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용도라는 것이다.


용두돈대 대포강화 덕진진앞 용두돈대에 있는 홍이포, 조선후기 에 주요지점에는 다 홍이포를 설치해서 운영했다. (2017년 5월 아들과 함께)


 

이런 홍이포를 청군이 병자호란 때 청군이 남한산성의 외동장대터에 해당하는 벌봉(정확히는 벌봉 옆 한봉) 주변까지 끌고 올라와 아마도 동문쪽 성벽을 직사로 공격 했던 모양이다. 이때 홍이포의 성능에 성내에 공포감은 상당했다고 한다. 영조때 부터 우리도 홍이포의 제작이 가능했는데 훗날 정조가 남한산성을 시찰하던 중에 병자년에 이 포를 배우지 못해서 사용하지 못한게 한탄스럽다고 하자 수어사 서명응이 그 때 홍이포가 잇었으면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했을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8일)


- 이괄의 난

내가 사학자가 아니므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조대에 이괄의 난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기 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즉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에 왕이 몽진을 했어야 했는데 이때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인하여 몽진 행렬이 처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준비한 남한산성에서는 병자호란에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었으니 좀더 튼튼한 피난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괄의 난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버린 일이 되어 버린 것


- 당시 사회 정세

조선시대 자연재해의 끝판왕은 뭐니뭐니해도 숙종대를 빼고는 말할 수가 없다. 당시는 소빙기에 해당하는 1620년에서 1720년 사이로 가뭄과 홍수 등으로 많은 백성들이 피폐해 졌고, 가뭄과 홍수가 없을 때는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매우 민심이 흉흉한데다가 본인이 환국을 통해 남인과 서인의 상당수를 죽음에 이르게한 일등과 합쳐져서 내부 반란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하여 피난처가 필요했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 삼아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일종의 뉴딜 정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 38권 숙종 29 3 25일에 내용을 살펴 보면 우의정 신완이 말하기를 "북한산성을 쌓는 큰 계획이 이미 정해져서, 바야흐로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경리(經理)하게 하여 번상(番上)한 군사도 교대로 부역(赴役)하게 했으니 민간을 번거롭고 요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 굶주린 백성이 서울에 많이 모였으니 만약 장정을 뽑아 내어 한편으로는 구제해 살리고 한편으로는 역사(役事)를 독려하면, 진실로 양편이 타당하게 될 것입니다. 의논하는흉년에 백성을 사역할 수 없다.’고 하지마는, 이는 그렇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옛날에 범중엄(范仲淹)이 항주(杭州)에 있을 적에 흉년을 만나자 사찰(寺刹)로 하여금 토목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게 하였고, 조변(趙抃)은 월주(越州)를 다스릴 적에 굶주린 백성을 모아서 주성(州城)을 쌓았으며, 부필(富弼)이 하북(河北)을 다스릴 적에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군졸을 얻었으니, 모두 옛사람이 이미 행한 증거입니다. 사찰과 주성(州城)은 원래 급한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흉년에 일을 하였으며, 이 성()은 종사(宗社)가 의탁할 바이며 만백성이 의지할 곳인데 계책을 정한 뒤에 어찌 흉년이란 이유로 그대로 정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여러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둘레[周回]를 살피고 헤아려서,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각각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맡아서 곧 역사를 시작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매우 컷다.


. 임난중과 그 이후(광해군)에 시행된 공명첩(이름이 비어있는 첩지)으로 인하여 양반이 늘어났다. 전란이후 국가의 재정을 위한 것이었지만 많이 팔았다.


공명첩출처 : http://study.zum.com/book/13713


. 공명첩이나 양반 족보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동법의 시행 등으로 인하여 상평통보가 본격 유통되면서 경제가 물물교환단계에서 시장 경제로 급속히 변해갔고 부를 축적하는 자가 늘었다.

. 숙종 때 왕가에 땅을 불하(절수)하는 양이 늘어났다.

. , , 다로 인하여 양반이 늘어나거나 이로 인하여 세수가 감소한다.


신분제변화조선후기 대구지역의 신분제 변화, 숙종 초기부터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출처 : 동북아 역사넷)



. 상대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군비가 많이 들었으나 징수대상인 양민이 줄어들면서 족징, 인징 등의 폐단이 늘었다. 그 과정에서 군대를 일부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군문의 반대로 실패한다.

. 중앙 관료의 자리가 서울 경기지역 출신이 독점하다 시피 하면서 지방 양반들은 각 지역의 서원을 중심으로 토호화 되기 시작했고 그수도 엄청나게 늘었다.(숙종대에 이르러 1도당 80~90개) 이로 인하여 서원의 재산에 대한 세수가 줄었다.

. 앞서 이야기 한 흉년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매우 곤궁했다. 이로 인하여 장길산 같은 도적이 창궐한다. 심지어 경기도 광주지역의 양민들이 때로 서울로 몰려와 관헌들의 출근을 막고 생계대책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숙종 23)


위의 여러 상황들을 볼 때 숙종의 북한 산성을 축성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잇다고 생각 한다. 물론 전문 사학자가 아닌 나로서 내리는 결론은 하계의 의견과는 다를 수 있지만 다음과 같지 않을까? 내가 사학자도 아니니 틀렸다기 보다는 자유로운 상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 이었으리라 보인다.


. 임진왜란(의주몽진), 정묘호란(강화도몽진), 병자호란(남한산성)등의 과정을 통하여 튼튼하고 방어가 편리한 피란처가 필요했다.

. 한양도성이 생각보다 커서 농성전이나 항전을 오래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 사회 저변이 불안하고 여러 차래 환국으로 인하여 급박한 일이 발생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계속)


북한산성기 2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3 - 대서문~대남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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