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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오르는 산

둘레길 8-5구간 왕실묘역길

8코스의 원래 계획은 8-1번 부터 순차적으로 1, 2, 3코스를 끝내고 5, 4코스는 도봉산으로 부터 거꾸로 오는 길로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행들의 일정등과 함게 다 꼬여 버린 상태라 8-1은 건너띄고 8-2하고는 바로 8-5구간으로 와버렸다. 8-5구간 부터 거꾸로 내려 오기로 하고 출발 했다. 이글을 쓰는 시점에는 우이신설선이 개통이 되서 지도에 우이 신설선이 나타나지만 실제로 지나갓던 날이었던 8월 12일은 아직 개통이 되지 않았던 시점이다.  


서울 둘레길 8-5구간 8-5구간은 지도의 우측 상단 보라색으로 표시된 구간이다. 도봉산역에서 시작해서 우이령 입구(북한산우이역)까지 코스이다. 거리는 6.9km


실제 지나갔던 구간은 다음과 같다. 거리는 6.9 km 아래 그래프와 같이 오르고 내림이 꽤 있어서 평균 속도는 대략 2km조금 남짓 한 정도 걸렸다. 쉬는 시간 포함한 시간이니 실제로는 2.7km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등산/하이킹
2017. 8. 12. 8:48 AM
소요 시간 3h 13m 37s , 거리 6.9 km
나무그늘길
-작성자 black207, 출처 램블러
도봉산역에서 우이령입구 쪽으로..

트립의 상세 내용을 보려면 http://rblr.co/Urux 를 클릭하세요.


출발은 도봉산 역에서 시작 했다. 거꾸로 방향을 잡은 이유는 특별한것은 없고 출발시간을 맞추기가 지하철 역으로 하는 것이 만나기도 편하고 정확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봉산 역까지는 만만치 않았다. 



둘레길 8구간이 끝나는 지점이라 둘레길 스탬프 하나 찍고 시작한다.



북한산 국립공원 입간판을 지나 왼쪽으로 다리를 넘어 간다. 


계곡에 물이 많은 편이었다. 



조금 들어가다 보면 능원사란 절이 나온다. 미륵기도도량이라고 하는데 소속된 종파(조계종이나 태고종등)가 없다. 1977년 자리잡은 절이라고 하며 미륵기도도량으로 불자들 사이엔 꽤 알려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찰이 굉장히 화려하고 단청이 어마어마 해서 절에 얽힌 인연들이 참 대단히 보인다. 



능원사에서 300미터쯤 더가면 이정표가 나오고 바로 화장실이 나온다. 산행에 난감하지 않으려면 항상 일은 깔끔히...












출발지점으로 1.2km 정도.. 북한산 둘레길의 도봉옛길 구간임을 알리는 표지가 나온다. 북한산 둘레길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운영을 하고 서울 둘레길은 서울시가 운영을 한다. 그리고 북한산 구간은 북한산 둘레길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북한산 둘레길의 스탬프 투어는 방식이 좀 다르다. 



북한산 둘레길의 도봉옛길 구간이 끝나고 방학동길로 들어간다.



























이런 저런 길들을 지나서 오면 쌍둥이 전망대가 나온다. 마침 여기가 맑은 날이 걸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울 둘레길 조망장소중에 최고라고 할만한 장소이다. 산쪽으로 보라보면 북한산의 줄기들이 보이고



반대쪽을 바라보면 서울 시내 많은 부분이 보인다.



아래는 쌍둥이 전망대의 모습인데, 모앙을 위해 나무를 일부러 베어내지 않고 탑을 만들어준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 인 듯 하다. 물론 올라가기 전까지는 인위적인 조망대라 좀 그렇긴 했지만...



나머지 방학동길 구간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숲길이다.












방학동길이 끝이 나고 왕실묘역길로 들어선다.



이정표에서 계속 보아온 정의공주(1415년 ~ 1477년)의 묘이다.

 


양효안공이라는 표시도 되어 잇는데 양효공 안맹담이라는 사람으로 죽산 안씨이며 정의 공주의 남편이다.

 

정의 공주는 세종의 세종의 셋째이면서 둘째 딸이다. 첫째가 일찍(13세)에 죽어 실질적인 적녀역활을 했으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남편인 안맹담의 가문인 죽산안씨의 족보에는 정의 공주가 세종을 도와 한글창제에 매우 큰 공을 세워 다수의 노비와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사가의 기록이라 정사로 인정 받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세종이 글자를 가져와 그 발음하는 원리를 파악 하는데 애를 먹고 있는데 그 방법을 풀어 내었다라고 해석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이 내용이 한글이 고조선의 가림토에서 왔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되기 때문인 듯 하다. 다만 정의 공주가 세종을 도왔다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되고 있다. 


“世宗憫(세종민) 方言不能以文字相通(방언불능이문자상통) 始製訓民正音(시제훈민정음)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而變音吐着(이변음토착) 猶未畢究(요미필구) 使諸大君(사제대군) 解之皆未能(해지개미능)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遂下于公主(송하우공주) 公主卽解究以(공주즉해구이) 

드디어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進世宗大加稱(진세종대가칭) 賞特賜奴婢數百口(상특사노비수백구)”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

이 글 중에 변음과 토착을 해난 것인지 변음과 토착을 기존에 있는 것을 풀어낸것인지에 대한 글의 해석을 가지고 논박을 하는 듯 했다. 뭐 자세한 논박은 역사학자들과 국어 학자들께 맞겨 놓더라도 정의 공주라는 분이 한글창제에 도움을 줬다는 것은 알고 잇으면 좋겠다고 생각 된다. 


여담으로 안맹담은 하도 술을 많이 먹어서 속깨나 썩였던 모양이다. 하도 술을 많이 먹어 안맹담의 집에 술친구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세종이 명령을 내렸다 할 정도... 그뒤에 세조 편에 서서 세조로 부터도 상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자손들이 다들 너무 똑똑해도 탈인가 보다. 




정의 공주 묘를 지나면 연산군(생 1476, 재위 1495~1506) 묘가 나온다. 문제적 인물 연산이다. 조선의 10대왕이자 잘못된 군주의 표상이며 조선의 왕중에 첫번째로 폐위된 국왕이다. 어찌보면 연산군을 중심으로 세조가 강화시켜 놓은 왕권이 신권과 역전이 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 된다. 문제는 이 권력의 전환이후 건강한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임진왜란까지 계속 내리막길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도 든다. 왜냐하면 왕권과 신권이 서로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 신권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연산군은 재위 12년 중에 초반 4년은 평균 이상의 군주였고 재위 10년까지만 해도 그렇저렇 중간정도는 되는 군주였다. 솔직히 아무일 한일 없는 2대왕 정종보다야 한일이 많은 편.. 


즉위초에 빈민구제, 왜구격퇴, 압록강에서 넘어오는 건주야인의 토벌, 사가독서(안식년이라고 보면 된다. 단 쉬라는게 아니고 공부하라는 것)제도의 부활을 통해 학문 풍토를 진작시키는 등... 언뜻 보면 저정도면 잘했네 할 정도의 실적들도 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사가독서에 사가란 휴가를 말한다고 한다. 즉 관직에서 잠시 쉬게 해줄테니 가서 공부좀 하고 오란 말이다. 일종의 안식년이긴 하지만 단순히 쉬라는 목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재가독서라고 해서 집에서 책좀 보라 했지만 빈번한 지인들의 출입으로 공부에 방해가 되자 조선 초기에는 산사독서(절에서 하는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루 성리학 국가에서 산사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하여 독서당이라는 장소를 만들고 거기서 공부 했다고 한다. 

원래는 지금의 용산자리의 폐사찰을 이용해 독서당을 만들었고 이후 중종대에 금호동 인근에 독서당을 만들어서 지금도 금호동을 지나는 길 이름이 독서당길이 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보면 연산군의 핵심은 성종때까지 어느정도 흐트러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행동이 많았고, 여기에 폐비의 문제까지 겹쳐지면서 사화가 발생하자 여기에 신하들이 신권을 유지하고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종반정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집권 말기 몇년간의 행동은 솔직히 심한건 사실이니 폭군은 폭군이다. 하지만 항상 합리적인 의심은 필요하니까... 










연산군묘 앞에는 서울의 보호수중에 가장 수령이 많은 83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간단히 말해 이 은행 나무는 연산군 묘가 들어서기도 전에, 조선이 건국 하기도 전에 고려시대 언제쯤에 저자리에 뿌리를 내린 나무라는 거다. 저 대단한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연산군묘를 지나 가다 보면 연산군 재실이 나온다. 연산군도 군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줫을 것이고 그 제사를 준비하고 제관들이 쉴수 잇는 공간으로서의 재실이라고 한다.



연산군 재실을 지나 조그만한 언덕을 하나 지나가면 둘레길 8-1의 끝을 알리는 스탬프 통이 나타난다.



돌아 보면 왕실 묘역길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내려가서 우이령 입구쪽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내려 갔다. 


8-5구간은 8월의 더운날 가서 그런지 정신 없이 지내왔던 것 같고 힘도 더든것 같았다. 하지만 더운날씨에도 습도는 건조한 편이라 정말 좋은 조망을 즐길 수 있는 구간이기도 했다. 쌍둥이 조망대는 가을에 다시한번 와보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