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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오르는 산

북한산성기(3)

4. 북한산성길


북한산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그 중 등산이 가장 쉬운 코스라고 한다면 다들 북한산성입구에서 대남문으로 올라가는 코스라고들 한다. 이 코스가 숙종이 영잉군(훗날 영조)을 데리고 행궁으로 올 라갔던 길이기도 하다. 보통 코스를 가는 사람들은 불광역이나 연신내 역에서 지하철을 내려서 704번 버스나 다른 여러 버스들을 이용해서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내려서 간다. 이 동네는 은평구 진관동인데 불광역에서 대략 30분 정도 10개 조금 넘는 버스 정거장을 가면 도착한다.


※참고 : 북한산성입구 교통편 

대중교통 : 불광역에서 34번, 704번 약 30~40분 소요 북한산성입구정류소에서 하차 

자 가 용  : 북한산성입구 주차장 이용(성수기 승용차 기준 첫 한시간 1,100원, 이후 10분당 250원, 9시간 이상 13,000원


불광역에서 구파발 방향으로 불광역 2번 출구에서 길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불광역 방향, 불광역 방향으로 버스를 탄다.


당일에는 704번을 타고 버스로 이동했다. 17개 정류장을 지나서 북한산성입구 정류소에서 하차, 우측으로 돌아 북한산성 입구쪽으로 올라 간다. 



도착한 곳은 거의 북한산 등산객을 위한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등산복이니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동네는 원래 북한산 안의 북한 동내에 거주하며 장사를 하고 있던 상가 55가구를 2010년부터 이주 시켜서 조성된 마을이다. 원래 북한동 주민들의 기원은 북한산성북 조성할 때 이곳으로 일거리를 찾아 왔더 주민들이 이후에 북한산성내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분들이 이후 북한산성 권역내에서 식장이나 등산용품 판매등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후 국립공원이 되고 난뒤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북한산동내에서 식당 등을 하고 있는 북한동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 오폐수 방류 등의 문제가 지속되어 마을 주민과 이주 협의를 거쳐 총 이주비 328억원을 지급하고 현재의 위치로 이주 했다고 한다. 그렇게 300여년의 북한동 역사도 새로운 시대로 변해 가고 지금은 그 흔적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깨끗한 자연이 돌아 온 것도 등산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행인 듯 하다.


이주 시작 전후로 모습이 궁금하여 인터넷을 한참 뒤져 보았으나 이주 시작 시점이 2010년 정도라 아직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되기 전이라 동내 사진 등이 인터넷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http://zetham.net/285 참조) 하지만 당시 계곡을 따라 술집들이 즐비 했고 북한산성입구에서 식당까지 미니버스등을 운행 하면서 등산객들의 원성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맑은 공기 마시러온 등산길에서 만난 빵빵거리고 지나가는 각종 차량에 등산객의 원성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조선일보 1997년 9월 9일자 기사를 보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무분별한 차량 출입으로 인한 공원훼손을 막기 위하여” 북한동내 성수기인 7, 8. 10월 및 토/일요일의 출입을 막았다고 하니 이미 오래 전부터 차량 통행이 말썽이었던 것 같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서문이 나온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서쪽 정문이다. 이곳 안쪽이 북한산성 지역이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성문중에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성문이다. 현재의 문루는 1958년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대서문 문루는 일제시대 말기에 파손된채 방치 되어 오던 것을 1958년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698만환을 들여 문루를 복원하고 우마차가 다니던 오솔길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한다. 현재 문루는 최헌길 지사가 당시 일을 적은 북한산성대서문중수기편액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쓴 대서문 현판이 걸려있다. 


대서문의 석조 구조물은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서쪽으로 난 방향에서 바라보면 문의 상당 좌우측에 누혈이라는 빗물 구멍이 나있다. 단순한 구멍도 간단히 만들지 않고 용머리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반대쪽으로 안쪽의 누혈은 모양만 갖춰지고 실제 빗물 구멍은 나있지 않는 모양이다.



또하나의 특징은 북한산의 각 문에 있는 여장은 한개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평여장이다. 보통 여장은 반원형 여장이건 철여장이건 평여장이건 관계없이 대부분 여러개의 돌이나 기와, 혹은 전돌(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북한산성의 각 문위에 있는 여장의 경우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 많이 보인다. 



화성 장안문 철여장수원 장안문의 옹성에 있는 철(凸)형 여장수원 화성 북암문 반원형 여장수원 화성 북암문 반원형 여장


북한산성 대서문안으로 들어서서 조금 가다 보면 잘 가꾸어진 한옥 한채가 보인다. 



2010년 까지만 해도 이주변에 마을이 있고 실제 주민이 거주 했었다고 합니다. 현재 몇채의 전통가옥은 그 혀태를 보존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옥들은 철거된 상태입니다. 원래는 휴게공간이나 공공시설로 쓰려고 하였는데 아직은 아직은 그런 형태로 개발 되지 않은 듯 하다. (참고 : http://blog.daum.net/architect1/12302305 )



조금더 올라가면 무량사라는 절이 나오고 좌측으로 계곡을 넘어 원효봉이 펼쳐진다. 저 원효봉 뒤가 북한산성의 북문이 위치하고 있다. 서문과 동문의 고도 차이는 정말 한참 차이가 난다. 온효봉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것이 북한산의 주봉들이다. 



무량사를 지나 다시 약 4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북한동 역사관이 나오고 좌측으로 보리사가 보이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서 보리사 쪽으로 계속가면 북한산 정상과 백운대로 가는 길이 나오고 가다가 왼쪽으로 꺽으면 우너효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오리는 다리를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길을 따라간다. 북한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파르지 않은 길이 계속된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중성문이 나타난다.



중성문은 북한산성기 2에서 이야기 한것 처엄 북한산성의 축조가 끝난 뒤에 추가로 만들어진 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서문의 누혈과 중성문의 누혈의 묘양이 달랐다. 같이 만들었다면 아무래도 비슷하게 만들어 졌을텐데 중성문의 누혈의 모습은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중성문을 지나서 올라갈수록 점차 가파르지는 않지만 고도가 높아 졌음을 느끼는 것이 갔을때 단풍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순간에 단풍 터널 속으로 들어와버린 산행객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탄성을 내밷었고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뒤 용학사 갈림길 주변으로 예전의 중흥사 권역을 알리는 알림판이 지나고 나고 



북한산의 아름다운정자인 산영루(山映樓)를 만나게 된다. 이름그대로 산이 비치는 누각이란 뜻인데 아마도 산의 모습이 북한천 계곡을 따라 비치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인듯 하다. 


현재의 산영루는 을축년(1924년) 대홍수 때 원래의 누각은 유실되고 2014년에 예전의 기록과 사진등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산영루는 기혹상 1603년 문잉 이정귀가 북한산일대를 유람한뒤에 남긴 기록에 산영루로 내려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북한산성 축조 이전부터 있었던것 같다. 이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등이 다녀갔다 하고 성호 이익 도 산영루를 삼각산 팔경의 하나로 기록했다 한다.



산영루 처마에 걸린 북한산 의상능선의 한자락을 담아 보았다.



위사진과 다른날 산영루앞 계곡 바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산영루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명소임이 티가나는 비석 거리가 있는데 특이한 비석 하나가 눈에 띄인다. 바로 경리청을 담당했던 민영준이라는 자의 비석중 파괴되고 남은 일부가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옆에 문화재를 소개해 주던 분에 말을 귀동냥해보니 명성왕후의 조카였으며 동학혁명에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말아먹은 장본인이며, 그의 아마버 민두호 부터 "민쇠갈구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물불 안가리고 돈만 탐한 일가로 유명하다. 민영휘의 원재 이름은 민영준으로 비석에는 민영준에 준짜가 반쯤 사라져 잇는데 조선 최대의 부호였고 선혜청을 담당하면서 세금 해먹는데 최고 였다고 한다. 

일제에 아부해서 작위를 받았고 그뒤 4대까지 떵떵거리며 사는데 휘문고등학교를 만든사람이라고도 한다. 한국 사학의 문제와 친일의 문제가 어느지점에서 만나는지를 보게해주는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아울러 그 후손중 민대식의 후손이 지금의 남이섬의 소유자 라고 한다. 나는 절대 다시 남이섬에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 남이섬 가서 놀다 왔다는 사람은 손가락질 해주리라...



그럼 왜 세금 도둑은 경리청에 왔을까? 이곳이 상당한 군량을 보관하고 있던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조금더 올라 가면 겅리청에서 관리하던 상창이라는 군량 저장소가 나온다. 여기에 10만명이 먹을 곡식을 준비 하는 것이 계획었고 다시 대남문 아래의 평창에 또 상당량의 군량을 보관하면서 관리했다는게 숙종대의 기록인데 민영휘가 있을때까지도 그런 빼먹을 꺼리가 있어 부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영휘의 비석을 뒤로하고 길을 재촉하면 점차 경사가 조금씩 급해지는 것을 다리에서 느끼게 된다. 



조금더 올라가면 앞에서 말한 경리청 상창지가 나온다. 여기는 식량과 군수품을 보관하던 경리청 상창과 관성소가 있던 곳인데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이 경리청을 두어 관할케 하고 북한산성내에는 그 산하기구로 관성소를 두어 관리케 하였다. 



상창에서 더 올라가면 보국사 절터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이시점 부터는 다양한 유적지에 대한 설명들이 나온다. 



보광사지를 조금 지나 보면 단풍 터널이 나오는데 이지점은 여름에 와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일품 지점이다.



여영청 유영지는 발굴이 한창이라 옆으로 돌아서 올라간다. 





돌아가면 계단이 나타나는데 조금 기울기가 더 급해졌다 싶은 지점이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대남문에 가까워 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남문 직전에 왼쪽으로 돌아서 대남문으로 올라간다. 


대남문은 1990년 복구를 했는데 당시 주요 목재는 헬기로 실어 올리고 기와는 일반 등산객들의 도움으로 한장씩 들어 올려서 진행 하였다.  






성곽위의 여장은 역시나 하나로된 화강암 형태다. 



여장너머 구기동 까지 멀리 보인다. 10월의 단풍이 한참일 때였다. 



원래 대남문은 큰 성문이 아니었다. 이름도 소남문이었고 사진에 보이는 문루도 없었다. 원래 남쪽 방향의 주문은 대성문인데 대성문은 대남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조 36년에 영조가 북한산에 오르면서 융복(군복)을 입고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총융사에게 갑주를 입고 대성문을 나와 대기하게 하였다. 이때는 북한산성에 올라가는 길로 창의문을 나가 대성문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대성문 길이 험하여 대성문 인근에서 내시의 등에 업혀 올라갔다고 한다.  북한산성을 돌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소남문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왕이 지나간 문이라 그대로 둘수가 없어 문루를 올리고 대남문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이길로 영조가 내려간 길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롭긴 하다. 다만 이런 천혜의 요새인 북한산성도 결국 실제로 국난을 막지는 못했고 어찌보면 이런 산성의 존재가 필요하지만 결국 국가를 보위하는 것은 합의된 국민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한다.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2 - 북한산성의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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