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북한산성길


북한산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그 중 등산이 가장 쉬운 코스라고 한다면 다들 북한산성입구에서 대남문으로 올라가는 코스라고들 한다. 이 코스가 숙종이 영잉군(훗날 영조)을 데리고 행궁으로 올 라갔던 길이기도 하다. 보통 코스를 가는 사람들은 불광역이나 연신내 역에서 지하철을 내려서 704번 버스나 다른 여러 버스들을 이용해서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내려서 간다. 이 동네는 은평구 진관동인데 불광역에서 대략 30분 정도 10개 조금 넘는 버스 정거장을 가면 도착한다.


※참고 : 북한산성입구 교통편 

대중교통 : 불광역에서 34번, 704번 약 30~40분 소요 북한산성입구정류소에서 하차 

자 가 용  : 북한산성입구 주차장 이용(성수기 승용차 기준 첫 한시간 1,100원, 이후 10분당 250원, 9시간 이상 13,000원


불광역에서 구파발 방향으로 불광역 2번 출구에서 길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불광역 방향, 불광역 방향으로 버스를 탄다.


당일에는 704번을 타고 버스로 이동했다. 17개 정류장을 지나서 북한산성입구 정류소에서 하차, 우측으로 돌아 북한산성 입구쪽으로 올라 간다. 



도착한 곳은 거의 북한산 등산객을 위한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등산복이니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동네는 원래 북한산 안의 북한 동내에 거주하며 장사를 하고 있던 상가 55가구를 2010년부터 이주 시켜서 조성된 마을이다. 원래 북한동 주민들의 기원은 북한산성북 조성할 때 이곳으로 일거리를 찾아 왔더 주민들이 이후에 북한산성내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분들이 이후 북한산성 권역내에서 식장이나 등산용품 판매등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후 국립공원이 되고 난뒤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북한산동내에서 식당 등을 하고 있는 북한동 마을 주민들에 의해서 오폐수 방류 등의 문제가 지속되어 마을 주민과 이주 협의를 거쳐 총 이주비 328억원을 지급하고 현재의 위치로 이주 했다고 한다. 그렇게 300여년의 북한동 역사도 새로운 시대로 변해 가고 지금은 그 흔적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깨끗한 자연이 돌아 온 것도 등산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행인 듯 하다.


이주 시작 전후로 모습이 궁금하여 인터넷을 한참 뒤져 보았으나 이주 시작 시점이 2010년 정도라 아직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되기 전이라 동내 사진 등이 인터넷에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http://zetham.net/285 참조) 하지만 당시 계곡을 따라 술집들이 즐비 했고 북한산성입구에서 식당까지 미니버스등을 운행 하면서 등산객들의 원성을 샀던 것으로 보인다. 맑은 공기 마시러온 등산길에서 만난 빵빵거리고 지나가는 각종 차량에 등산객의 원성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조선일보 1997년 9월 9일자 기사를 보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무분별한 차량 출입으로 인한 공원훼손을 막기 위하여” 북한동내 성수기인 7, 8. 10월 및 토/일요일의 출입을 막았다고 하니 이미 오래 전부터 차량 통행이 말썽이었던 것 같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서문이 나온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서쪽 정문이다. 이곳 안쪽이 북한산성 지역이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성문중에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성문이다. 현재의 문루는 1958년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대서문 문루는 일제시대 말기에 파손된채 방치 되어 오던 것을 1958년 최헌길 경기도지사가 698만환을 들여 문루를 복원하고 우마차가 다니던 오솔길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한다. 현재 문루는 최헌길 지사가 당시 일을 적은 북한산성대서문중수기편액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쓴 대서문 현판이 걸려있다. 


대서문의 석조 구조물은 좀 특이한 면이 있다. 서쪽으로 난 방향에서 바라보면 문의 상당 좌우측에 누혈이라는 빗물 구멍이 나있다. 단순한 구멍도 간단히 만들지 않고 용머리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반대쪽으로 안쪽의 누혈은 모양만 갖춰지고 실제 빗물 구멍은 나있지 않는 모양이다.



또하나의 특징은 북한산의 각 문에 있는 여장은 한개의 화강암을 깍아서 만든 평여장이다. 보통 여장은 반원형 여장이건 철여장이건 평여장이건 관계없이 대부분 여러개의 돌이나 기와, 혹은 전돌(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북한산성의 각 문위에 있는 여장의 경우 화강암으로 된 평여장이 많이 보인다. 



화성 장안문 철여장수원 장안문의 옹성에 있는 철(凸)형 여장수원 화성 북암문 반원형 여장수원 화성 북암문 반원형 여장


북한산성 대서문안으로 들어서서 조금 가다 보면 잘 가꾸어진 한옥 한채가 보인다. 



2010년 까지만 해도 이주변에 마을이 있고 실제 주민이 거주 했었다고 합니다. 현재 몇채의 전통가옥은 그 혀태를 보존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옥들은 철거된 상태입니다. 원래는 휴게공간이나 공공시설로 쓰려고 하였는데 아직은 아직은 그런 형태로 개발 되지 않은 듯 하다. (참고 : http://blog.daum.net/architect1/12302305 )



조금더 올라가면 무량사라는 절이 나오고 좌측으로 계곡을 넘어 원효봉이 펼쳐진다. 저 원효봉 뒤가 북한산성의 북문이 위치하고 있다. 서문과 동문의 고도 차이는 정말 한참 차이가 난다. 온효봉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것이 북한산의 주봉들이다. 



무량사를 지나 다시 약 4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북한동 역사관이 나오고 좌측으로 보리사가 보이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서 보리사 쪽으로 계속가면 북한산 정상과 백운대로 가는 길이 나오고 가다가 왼쪽으로 꺽으면 우너효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오리는 다리를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길을 따라간다. 북한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파르지 않은 길이 계속된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중성문이 나타난다.



중성문은 북한산성기 2에서 이야기 한것 처엄 북한산성의 축조가 끝난 뒤에 추가로 만들어진 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서문의 누혈과 중성문의 누혈의 묘양이 달랐다. 같이 만들었다면 아무래도 비슷하게 만들어 졌을텐데 중성문의 누혈의 모습은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중성문을 지나서 올라갈수록 점차 가파르지는 않지만 고도가 높아 졌음을 느끼는 것이 갔을때 단풍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순간에 단풍 터널 속으로 들어와버린 산행객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탄성을 내밷었고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뒤 용학사 갈림길 주변으로 예전의 중흥사 권역을 알리는 알림판이 지나고 나고 



북한산의 아름다운정자인 산영루(山映樓)를 만나게 된다. 이름그대로 산이 비치는 누각이란 뜻인데 아마도 산의 모습이 북한천 계곡을 따라 비치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인듯 하다. 


현재의 산영루는 을축년(1924년) 대홍수 때 원래의 누각은 유실되고 2014년에 예전의 기록과 사진등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산영루는 기혹상 1603년 문잉 이정귀가 북한산일대를 유람한뒤에 남긴 기록에 산영루로 내려온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북한산성 축조 이전부터 있었던것 같다. 이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등이 다녀갔다 하고 성호 이익 도 산영루를 삼각산 팔경의 하나로 기록했다 한다.



산영루 처마에 걸린 북한산 의상능선의 한자락을 담아 보았다.



위사진과 다른날 산영루앞 계곡 바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산영루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명소임이 티가나는 비석 거리가 있는데 특이한 비석 하나가 눈에 띄인다. 바로 경리청을 담당했던 민영준이라는 자의 비석중 파괴되고 남은 일부가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옆에 문화재를 소개해 주던 분에 말을 귀동냥해보니 명성왕후의 조카였으며 동학혁명에 청군을 끌어들여 나라를 말아먹은 장본인이며, 그의 아마버 민두호 부터 "민쇠갈구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물불 안가리고 돈만 탐한 일가로 유명하다. 민영휘의 원재 이름은 민영준으로 비석에는 민영준에 준짜가 반쯤 사라져 잇는데 조선 최대의 부호였고 선혜청을 담당하면서 세금 해먹는데 최고 였다고 한다. 

일제에 아부해서 작위를 받았고 그뒤 4대까지 떵떵거리며 사는데 휘문고등학교를 만든사람이라고도 한다. 한국 사학의 문제와 친일의 문제가 어느지점에서 만나는지를 보게해주는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아울러 그 후손중 민대식의 후손이 지금의 남이섬의 소유자 라고 한다. 나는 절대 다시 남이섬에 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 남이섬 가서 놀다 왔다는 사람은 손가락질 해주리라...



그럼 왜 세금 도둑은 경리청에 왔을까? 이곳이 상당한 군량을 보관하고 있던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조금더 올라 가면 겅리청에서 관리하던 상창이라는 군량 저장소가 나온다. 여기에 10만명이 먹을 곡식을 준비 하는 것이 계획었고 다시 대남문 아래의 평창에 또 상당량의 군량을 보관하면서 관리했다는게 숙종대의 기록인데 민영휘가 있을때까지도 그런 빼먹을 꺼리가 있어 부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민영휘의 비석을 뒤로하고 길을 재촉하면 점차 경사가 조금씩 급해지는 것을 다리에서 느끼게 된다. 



조금더 올라가면 앞에서 말한 경리청 상창지가 나온다. 여기는 식량과 군수품을 보관하던 경리청 상창과 관성소가 있던 곳인데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이 경리청을 두어 관할케 하고 북한산성내에는 그 산하기구로 관성소를 두어 관리케 하였다. 



상창에서 더 올라가면 보국사 절터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이시점 부터는 다양한 유적지에 대한 설명들이 나온다. 



보광사지를 조금 지나 보면 단풍 터널이 나오는데 이지점은 여름에 와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일품 지점이다.



여영청 유영지는 발굴이 한창이라 옆으로 돌아서 올라간다. 





돌아가면 계단이 나타나는데 조금 기울기가 더 급해졌다 싶은 지점이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대남문에 가까워 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대남문 직전에 왼쪽으로 돌아서 대남문으로 올라간다. 


대남문은 1990년 복구를 했는데 당시 주요 목재는 헬기로 실어 올리고 기와는 일반 등산객들의 도움으로 한장씩 들어 올려서 진행 하였다.  






성곽위의 여장은 역시나 하나로된 화강암 형태다. 



여장너머 구기동 까지 멀리 보인다. 10월의 단풍이 한참일 때였다. 



원래 대남문은 큰 성문이 아니었다. 이름도 소남문이었고 사진에 보이는 문루도 없었다. 원래 남쪽 방향의 주문은 대성문인데 대성문은 대남문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조 36년에 영조가 북한산에 오르면서 융복(군복)을 입고 북한산성을 관리하는 총융사에게 갑주를 입고 대성문을 나와 대기하게 하였다. 이때는 북한산성에 올라가는 길로 창의문을 나가 대성문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대성문 길이 험하여 대성문 인근에서 내시의 등에 업혀 올라갔다고 한다.  북한산성을 돌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소남문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왕이 지나간 문이라 그대로 둘수가 없어 문루를 올리고 대남문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이길로 영조가 내려간 길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롭긴 하다. 다만 이런 천혜의 요새인 북한산성도 결국 실제로 국난을 막지는 못했고 어찌보면 이런 산성의 존재가 필요하지만 결국 국가를 보위하는 것은 합의된 국민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한다.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2 - 북한산성의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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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한산성의 역사 - 축성과정


당시 숙종대에는 한양도성에 대한 보수, 남한산성의 동장대 앞 외성 축성 등 다양한 축성 사업이 이어졌다. 한양도성의 여러부분에 숙종대 축성의 흔적이 남아있는다. 북한산성은 이런 다양한 축성경험이 축적되어서 인지 공사관리를 잘해서인지 정확히는 파악이 안되나 단 6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 한다. 물론 애초부터 북한산의 입지에 의하여 축성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되어 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 된다. 각 지역에 동시 다발적으로 공사를 하여 빠른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한양도성의 축성시기에 따른 형태 안내 - 한양도성 낙산구간 한양도성은 여러차래 축성과 보수를 거친다. 주로 4차례의 공사가 있는데 숙종때 공사가 그중 큰 부분이다.




낙산에서 남삼으로 가는 한양도성의 성곽에서 세종대 축성과 숙종대 축성을 비교래볼 수 있는 구간이다. 



숙종대와 세종대의 축성형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서울 성곽의 모습, 좌측이 세종대 우측이 숙종대





북한산성의 축성과 관리는 남한산성처럼 승병에게 맡겨 졌는데 이는 숙종 대에 남인인 윤휴가 북벌론을 꺼내 들면서 주장한 바도 있거니와 임진왜란 이후 승병이 조직화 될 수 있는 상황을 본 정부 입장에서는 승병을 아예 조직화 해서 정규 군인화 하고 산성 등에 배치 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용한 정책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워낙 사찰이 조선시대에 산중에 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산성 축조에는 아주 적합한 인력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불교를 어느정도 인정해 주는 듯 하지만 결국 모자란 군역의 인원에 대해 승려들을 동원해서 채우는 효과도 있었으리라.

북한산성은 엄밀히 봐서 3단계의 공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본성의 공사로 1711년 2월에 앞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왕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같은해 4월 3일 공사를 시작해서 9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37년 10월19일에 북한성 역사를 마치다라고 하며 성곽의 개요와 들어간 비용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의상봉에서 가사당암문 쪽으로 가는 중간의 북한산성

두번째 행궁의 조성으로 1711년 본성의 공사가 완료되기 직전인 8월에 담당관리를 지정하고 공사에 들어간다. 원래 내전의 완공은 10월, 외전은 이듬해 2월에 마치려고 하였으나 날씨등의 문제로 모든 공사는 1712년 5월에 가서야 완성된다. 아마도 숙종이 행차했을 당시는 내저과 외전의 일부만 공사가 완료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진


북한 산성 행궁의 옛날 사진은 노란잠수함님의 블로그에서 많이 볼수 있다. 


세번째 공사에 해당하는 것은 먼저 본성을 완공한 뒤 숙종은 직접 시찰을 하고 나서 있는데 숙종은 공사 완공 이후 세자 영잉군(이후 영조)와 함께 북한산성에 오르면서 전시 통로인 대성문으로 가지 않고 대서문으로 돌아서 들어간다. 물론 전시가 아니니 굳이 고생스러운 길을 나이많은 숙종이 갈필요가 없었고 아울러 민정을 살피면서 가기 위함 이었을 것이다. 이때 대서문을 지나 시단봉에 올라보고 임금이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51권, 1712년 4월 10일) 실제로도 북한산성 오르는 길중 대서문에서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가 가장 편안한 산길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아마도 내부 길들이 정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중성문과 아래의 수문은 이렇게 하여 1714년 중성문이 완성된다.


중성문 사진




아울러 북한산성의 본성은 아니지만 북한산성의 축조와 탕춘대성의 축조는 사실상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는 숙종 41년에 상신 이유에 의하여 북한산에 대해 조치할 일들을 올리는데 그 중에 탕춘대성의 조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전략)

그는 아울러 다음과 같이 탕춘대성의 축조를 청하였다. 

 "탕춘대가 있는 지역도 역시 천연의 요새지입니다. 전에는 도성의 엣 성첩이 있었고, 후에 다시 북한산성이 새로이 쌓았는데, 지금은 수문 역사가 완전히 끝나서 허술할 우려가 없고 인민들도 편안히 살 생각을 가지게 되어, 단지 외적을 막을 수 있는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문에서 서쪽으로 문수봉 앞까지, 또 백악산에서 대성문 밖까지의 지역에 장페물이 없습니다. 만약 지형의 험한 것만 믿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는 만전의 계획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두 방면에 토성을 쌓는다면 적은 공력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백악산의 상황을 살펴보면 북쪽의 대성문 밖 산록까지는 예로부터 소로가 있어,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없이 토사가 흘러내려 언덕이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외면을 따라서 견고하게 토성을 축조하고 토성 안쪽에다 새 흙을 보충하여 그 위에 떼를 입힌뒤에 잡목을 심는다면, 적을 방어하는 대책이 완비될 것이며, 산기슭이 견고해져서 영원히 무너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후략)


국역북한지 42 page, 숙종 41년 을미에 상신(相臣) 이유(李儒)가 북한산에 대해조치할 일들을 전달하다 중에서




탕춘대가 있던 탕춘대터, 새검정 근처에 있다.



처음 북한산을 가기 시작할 때 탕춘대성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로 많이 올라 갔는데 도저히 그 지세와 모양이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북한지에 나와있는 이유의 주장 내용과 고지도를 비교해 보고서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붉은선이 대략적인 탕춘대성, 파란선이 한양도성, 파란색 동그라미는 탕충대 터의 위치이다. 탕춘대성의 우측이 평창동 지역이다.



도성의 둘레와 북한산의 굴레의 양쪽에 토성을 쌓고 그 중간인 평창동 지대에 곡식창고를 두면 도성에서 북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주트가 보호가 됨은 불론 평창의 곡식을 북한산성내로 옮기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기리고 임금은 탕춘대성과 북한산 형제봉에서 북악으로 연결되는 산사이의 길을 따라 안전하게 대성문쪽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을 출구로 해서 인왕산에서 자락에서 탕춘대성이 시작해서 비봉으로 연결되는 형세를 가지게 된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가적인 주변 시스템의 정비가 끝남으로서 북한산성이 완전히 정비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얼마되지 않아 숙종사후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고 이 이후 한양의 방위 정책이 산성방수체제에서 도성수호체제 변경되면서 북한 산성의 중요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형제봉 능선에는 산성이 축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지의 저자인 성능도 이부분에 대해서 북한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북한산성의 축성은 숙종 때에 시작되었으며 만세를 염두에 둔 심원한 계획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축성한 이후에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곧 아무도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 당시 재상들처럼 전심전력을 다하여 계획하고 시행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즉 지난 날의 공훈도 모두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국역 북한지 66page(1745년)


성능이 부간지를 기록한 것이 1745년이니 이미 이때는 숙종이 죽은지 25년 이후였고 때는 영조 때였다. 이미 많은 저간의 사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숙종대 상평통보의 유통과 더불어 대동법, 고립제(삯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제도)의 시행과 유이민의 대책의 변화 등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양의 영향권도 한강변까지 미쳤고 인구도 20~30만으로 늘어났다. 초기 10만 정도 산성에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 불가능해 져버렸다. 아울러 경제가 강해질수록 있는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짐은 물론이다. 여기에 영조대에 왕의 정통성 시비로 인해 발발한 이인좌의 난을 겪으면서 영조가 절대 수도를 버리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도성 사수론이 강화되게 되었다. 물론 임금의 보장처 개념이 사라진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책 변화로 인하여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후의 도성주변의 방위는 북쪽의 개성유수부, 서쪽의 강화유수부, 동쪽의 광주유수부, 남쪽의 수원유수부가 수도권 외곽을 담당하고, 도성의 외곽은 북한산성의 총융청(탕춘대성에 주둔), 남한산성의 수어청으로 도성 외곽을 방어하며 도성내에는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도성 내부를 담당하게 되어 조선 후기까지의 군사 체제가 정조대에 완비된다. 


(계속)


북한산성기 1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3 - 대서문~대남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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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산, 그리고 북한산성




지난 두 주 동안 북한산 단풍구경을 잘 다녀왔다. 북한산성을 가겠다고 의식하고 간적은 없으나 북한산을 다니다 보니 북한산성의 존재(그 전에는 남한산성이 있으니 북한산성도 있겠지 수준의 인식이었다.)를 알게 되고 그 험준한 곳에 왜 산성이 들어섰는지, 그리고 한양 도성 순성을 여러번 해본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될 만큼 잘 지어놓은 도성을 놔두고 도성 바로 뒤에 저런 산성을 마련했는지 등이 궁금하게 되었다. 아울러 비봉을 올라가는 길에 탕춘대성 암문을 통과 하면서 도대체가 한양도성과의 관계는 뭐고 탕춘대성은 어디를 둘러 싼 것도 아닌 성이 이렇게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어딘가에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는 곳이 없었다.


탕춘대성 암문둘레길 8-2구간 중의 탕춘대성 암문, 둘레길을 올라가는 길이자 향로봉쪽으로 북한산을 올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탕춘대성 입구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많다.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유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홍지동(4번지)일대

지정현활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33호


  탕춘대성은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성으로서, 도성과 외곽성(북한산성)의 방어기능을 보완하고 군량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본래 북한산성을 쌓자마자 탕춘대성을 축성하려 하였으나 곧바로 시작하지 못하고 1718~1719년 두 해에 걸쳐 성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 성을 탕춘대성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연산군의 연회장소인 탕춘대가 지금의 세검정 동쪽으로 100m쯤 떨어진 산봉우리(현재 세검정초등학교)에 있던 것과 관련이 있으며, 한성의 서쪽에 있가하여 서성(西城)으로도 불렀습니다. 

  인왕산 북동쪽에서 시작한 탕춘대성은 북한산 비봉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고 길이는 약 5.1km에 달합니다. 보현봉~형제봉~북악산을 잇는 능선에도 성을 쌓으려 하였으나 숙종의 사망 등 정치적인 이유로 시행하지 못한 체 지금의 성곽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탕춘대성은 조선후기 혼란기 속에서 훼손되고 홍수 등으로 일부 구간이 무너지고 방치되다가 1977년 홍지문과 함께 일부 구간이 복원되고 정비되었습니다.


탕춘대성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설명이 없다보니 위 설명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군량을 저장한다는 건 또 무슨말인지, 그런 중요한 성이 왜 버려졌는지... 그리고 정확한 북한산성과의 관계는 뭔지 등등... 


각 위키를 보면 북한산이 숙종대에 만들어 졌다는 것과 대략적인 역사 그리고 내부 시설이 어떤어떤 것 있는지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왠지 이런 험준한 산지에 성을 쌓았다면 생각 보다 많은 반대가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해야 하는 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정리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좀 많은 검색과 관련 문헌의 참조를 했어야 하지만 생각 보다 재미있는 일이었고, 나름 아마추어적인 역사공부의 재미를 볼 수 있는 과정이었다.

 

2. 북한산성의 역사 - 축성의 배경


산행을 마치고 와서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북한산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서 상세한 검색을 해보았다. 인터넷상에는 생각 보다 많은 자료가 있었고 특히 서울역사편찬위원회의 『국역 북한지』는 가장 정확한 사료이며 많은 답을 해주는 내용이었다.(서울역사편찬위원회 국역 북한지는 ebook으로 서비스 되고 있다.)


북한지성능의 북한지, 북한산성 지도가 그려져 있다. 서울시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북한지를 국역하여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북한지는 승려 성능(聖能)1745(을축년) 11월에 북한산성에서 팔도도총섭의 임무를 끝내고 후임도총섭인 서봉(瑞鳳)에게 인계를 위해 판각하여 작성한 내용이며 1711년 북한산성의 축성 이전의 상황부터 북한산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북한산성에 대해서 가장 자세한 내용일 것이다.

 

도총섭(都摠攝)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임명하는 불교승려의 최고직위, 조선초기에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임명한 사례가 별로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승병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국가에서 임명하였다. 북한산성도 성능을 팔도 도총섭으로 하여 축성하였고 남한산성도 마찬가지로 각성이라는 승려가 도총섭으로 책임을 지고 구축 하였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사전 


1) 북한산성의 연혁


북한 산성은 생각 보다 그 연혁이 길다. 이미 온조왕 14(B.C 5, 전한의 애제 건평 2)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뒤에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4대왕 개루왕이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장수왕 침입 때 개로왕이 탈출하다 죽은 뒤 산성을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의 문종이 한양 도성 수비의 단점을 파악하고 도성주변의 축성을 논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대신이 백성을 힘들게 한다고 반대하여 논의만 하였다.(문종 원년 1451) 이후 실제 축성은 숙종에 이르러야 진행 되게 되는데 이것은 병자호란을 통하여 남한산성에서 느꼈던 많은 단점으로 인하여 그 필요성이 대두 되어서였다고 한다. 다른 것 보다 특히 남한산성이 좁아서 내부에 식량 비축이 떨어졌으며 여기에 결정적인 강화도 함락에 따라 패배 한 것으로 인식 되어 새로운 대피처가 필요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북한산성의 축성 논의


북한산 축성에 대한 논의 과정은 길고도 험난하다. 숙종 원년에 논의를 시작해서 무려 36년간이나 다양한 내용을 논의 하면서 산성의 내용을 정해 간다.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1권에 기록에 따르면 숙종원년 11월에 북한산성의 수축을 논의 하는데 윤연혁은 북한산의 산세가 험하고 한쪽으로만 열려 있어 수축 자체의 일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면서 유사시에 임금이 자리를 옮길 자리가 마땅치 않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남한산성을 왕의 대피처로 보지 않는 듯 한 내용이 있다. 내용상 남한산성은 좁아서 유사시에 청야전술을 하기에는 좁으니 도성에서 가까우면서 지형이 좋은 북한산 주변에 수축하자는 논의가 되고 숙종이 이를 허락한다. 하지만 이후 무려 37년 동안 갑론을박이 펼쳐지는데 결국 숙종 37 2월에 북한산내에 물 부족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숙종이 다들 뜻을 모으기만 기다린다면 어찌 이를 이룰 수 있는 날이 있겠는가?”라며 축성을 밀어 붙인다.


3) 북한산성의 축성이유 및 목적


- 임진왜란의 경험

임진왜란 당시 인조가 의주로 몽진을 하면서 이후 도성이 황폐화 되었고 임금이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왕조에서 국민을 버린 임금이 당연히 격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숙종도 이런 부분을 무겁게 받아 들인 듯 하다. 결국 유사시에 임김이 백성과 함께 항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도성 가까이에 피난처가 필요했다.(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숙종, 영조, 정조가 북한산성에 오른 까닭 참조)


- 병자호란의 경험

북한산성의 기본적인 축성 이유는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의 항전과정의 경험이 가장 주효했다. 인조 때에 이미 북방의 상태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미리 준비 했지만 준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허망하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강화도, 남한산성을 피난처로 쓰는 것 자체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피난처를 새로이 구해야겠다고 생각 한다.


남한산성도 영남대박물관소장남한산성도, 영남대 박물관소장, 우상단의 동문 윗쪽 동장대 앞에 외동장대와 외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대에 벌봉주변에 외성을 쌓고난 뒤의 지도, 원래 남한 산성에는 벌봉주변에 성이 없었는데 청군이 벌봉주변에 홍이포를 끌고와 포를 쏘면서 항전의지에 많은 타격을 주었다 한다.


병자 호란의 경험중 또하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무기의 등장이었다. 홍이포(紅夷砲)의 등장이다. 홍이는 네델런드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중국인 네델런드인과의 전투중에 경험하고 이를 수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명나라에서 홍이포를 제작할 수 있게 된것은 1621년이라고 한다. 

홍이포는 컬버린(Culverin)의 일종으로 직사형의 대포이고 철환(쇠공)을 넣어 공성전용으로 사용하는 대포이다. 성광에다가 직접 쏴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용도라는 것이다.


용두돈대 대포강화 덕진진앞 용두돈대에 있는 홍이포, 조선후기 에 주요지점에는 다 홍이포를 설치해서 운영했다. (2017년 5월 아들과 함께)


 

이런 홍이포를 청군이 병자호란 때 청군이 남한산성의 외동장대터에 해당하는 벌봉(정확히는 벌봉 옆 한봉) 주변까지 끌고 올라와 아마도 동문쪽 성벽을 직사로 공격 했던 모양이다. 이때 홍이포의 성능에 성내에 공포감은 상당했다고 한다. 영조때 부터 우리도 홍이포의 제작이 가능했는데 훗날 정조가 남한산성을 시찰하던 중에 병자년에 이 포를 배우지 못해서 사용하지 못한게 한탄스럽다고 하자 수어사 서명응이 그 때 홍이포가 잇었으면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했을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8일)


- 이괄의 난

내가 사학자가 아니므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조대에 이괄의 난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기 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즉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에 왕이 몽진을 했어야 했는데 이때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인하여 몽진 행렬이 처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준비한 남한산성에서는 병자호란에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었으니 좀더 튼튼한 피난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괄의 난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버린 일이 되어 버린 것


- 당시 사회 정세

조선시대 자연재해의 끝판왕은 뭐니뭐니해도 숙종대를 빼고는 말할 수가 없다. 당시는 소빙기에 해당하는 1620년에서 1720년 사이로 가뭄과 홍수 등으로 많은 백성들이 피폐해 졌고, 가뭄과 홍수가 없을 때는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매우 민심이 흉흉한데다가 본인이 환국을 통해 남인과 서인의 상당수를 죽음에 이르게한 일등과 합쳐져서 내부 반란의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하여 피난처가 필요했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 삼아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일종의 뉴딜 정책을 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 38권 숙종 29 3 25일에 내용을 살펴 보면 우의정 신완이 말하기를 "북한산성을 쌓는 큰 계획이 이미 정해져서, 바야흐로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경리(經理)하게 하여 번상(番上)한 군사도 교대로 부역(赴役)하게 했으니 민간을 번거롭고 요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 굶주린 백성이 서울에 많이 모였으니 만약 장정을 뽑아 내어 한편으로는 구제해 살리고 한편으로는 역사(役事)를 독려하면, 진실로 양편이 타당하게 될 것입니다. 의논하는흉년에 백성을 사역할 수 없다.’고 하지마는, 이는 그렇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옛날에 범중엄(范仲淹)이 항주(杭州)에 있을 적에 흉년을 만나자 사찰(寺刹)로 하여금 토목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게 하였고, 조변(趙抃)은 월주(越州)를 다스릴 적에 굶주린 백성을 모아서 주성(州城)을 쌓았으며, 부필(富弼)이 하북(河北)을 다스릴 적에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군졸을 얻었으니, 모두 옛사람이 이미 행한 증거입니다. 사찰과 주성(州城)은 원래 급한 일이 아닌데도 오히려 흉년에 일을 하였으며, 이 성()은 종사(宗社)가 의탁할 바이며 만백성이 의지할 곳인데 계책을 정한 뒤에 어찌 흉년이란 이유로 그대로 정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여러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둘레[周回]를 살피고 헤아려서,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각각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맡아서 곧 역사를 시작하게 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매우 컷다.


. 임난중과 그 이후(광해군)에 시행된 공명첩(이름이 비어있는 첩지)으로 인하여 양반이 늘어났다. 전란이후 국가의 재정을 위한 것이었지만 많이 팔았다.


공명첩출처 : http://study.zum.com/book/13713


. 공명첩이나 양반 족보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동법의 시행 등으로 인하여 상평통보가 본격 유통되면서 경제가 물물교환단계에서 시장 경제로 급속히 변해갔고 부를 축적하는 자가 늘었다.

. 숙종 때 왕가에 땅을 불하(절수)하는 양이 늘어났다.

. , , 다로 인하여 양반이 늘어나거나 이로 인하여 세수가 감소한다.


신분제변화조선후기 대구지역의 신분제 변화, 숙종 초기부터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출처 : 동북아 역사넷)



. 상대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군비가 많이 들었으나 징수대상인 양민이 줄어들면서 족징, 인징 등의 폐단이 늘었다. 그 과정에서 군대를 일부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군문의 반대로 실패한다.

. 중앙 관료의 자리가 서울 경기지역 출신이 독점하다 시피 하면서 지방 양반들은 각 지역의 서원을 중심으로 토호화 되기 시작했고 그수도 엄청나게 늘었다.(숙종대에 이르러 1도당 80~90개) 이로 인하여 서원의 재산에 대한 세수가 줄었다.

. 앞서 이야기 한 흉년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매우 곤궁했다. 이로 인하여 장길산 같은 도적이 창궐한다. 심지어 경기도 광주지역의 양민들이 때로 서울로 몰려와 관헌들의 출근을 막고 생계대책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숙종 23)


위의 여러 상황들을 볼 때 숙종의 북한 산성을 축성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잇다고 생각 한다. 물론 전문 사학자가 아닌 나로서 내리는 결론은 하계의 의견과는 다를 수 있지만 다음과 같지 않을까? 내가 사학자도 아니니 틀렸다기 보다는 자유로운 상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 이었으리라 보인다.


. 임진왜란(의주몽진), 정묘호란(강화도몽진), 병자호란(남한산성)등의 과정을 통하여 튼튼하고 방어가 편리한 피란처가 필요했다.

. 한양도성이 생각보다 커서 농성전이나 항전을 오래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 사회 저변이 불안하고 여러 차래 환국으로 인하여 급박한 일이 발생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계속)


북한산성기 2 - 북한산성의 역사 


북한산성기 3 - 대서문~대남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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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구간중에 둘레길 마지막은 3-3구간과 3-2구간이 되었다. 3-1구간은 이미 이전에 마쳤는데 아침시간에 고덕까지 가는데 좀 귀찮은 면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 가기 편한 분들도 있겠지만 내입장에서느 여러번 환승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교통편의 편의성등을 고려해서 수서역에서 출발해서 고덕역으로 가는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3-3과 3-2코스를 하루에 마치기로 작정하고 길을 떠났다. 덕분에 거리는 16.5km로 긴편이었다. 하지만 전체 길은 조금 심심한편.. 대부분이 하천길과 평지길이고 일자산을 넘어갈때 산속으로 들어 간다. 다만 다음에 다시 간다고 한다면 고덕에서 수서쪽으로 할 것 같다. 끝나는 지점에서 산속을 다니니 조금더 지치게 되는 듯 했다. 

하천길은 탄천에서 시작해서 장지천으로 들어가서 송파 파인타운 아파트 단지를 통과해서 장수공원을 지나 장지근린공원을 따라서 성내천으로 들어가서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가는 8-3코스와 거기서 부터 둔촌동까지 대로를 따라 걷다가 일자산으로 올라 강동경희대병원뒤로 해서 고덕역 근처로 가는 3-2코스 로 나누어진다. 


전체 코스는 다음과 같다. 


등산/하이킹
2017. 9. 9. 8:24 AM
소요 시간 4h 52m 32s , 거리 16.5 km
원래 소코스 두개임.고덕역에서 수서 방향으오 타는 것도 괜찮을 듯.
-작성자 black207, 출처 램블러
총 16키로이상의 거리, 높은산은 아니지만 거리가 길고 오르고 내림으로 힘은 생각보다 조금 드는 코스
트립의 상세 내용을 보려면 http://rblr.co/Vsiy 를 클릭하세요.


수서 역에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리면서 코스를 확인해 본다. 이번 코스는 둘레길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에 3-3코스와 3-2코스를 한번에 가기로 하고 길이로는 제일 길게 잡았다. 물론 산을 잘 타거나 걷기에 매우 자신 있는 분에게는 16km 정도가 무리한 거리는 아니겠지만 아직 그러기엔 내공도 부족하고 100kg을 조금 넘는 고도비만인 나에게는 그리 호락호락 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평지길이라 무난하리라 하고 출발했다. 물론 서두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그러려면 이번 코스는 고덕역에서 출발하는 게 나을 뻔 했다. 한참 걷고 나서 일자산과 강동경희대 병원 뒷산은 낮지만 지친 다리에 만만치는 않았다




가볍게 아침에 시원한 커피 한잔을 하고 탄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미트 옆으로 직진하면 다리를 지나 탄천으로 접어드는 길이 나온다















일단 출발지에서 도장하나 찍고 시작한다. 이제 남은 도장은 방이동 생태보전지역 앞에 있는 도장이 마지막이다.



도장을 찍고 뒤로돌아 탄천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면 둘레길이 성내천을 향한다는 표지판이 나온다. 항상 표지판을 볼 때마다 앞구정동에 있는 고속도로 표지판에 부산이라고 써져 있는 표지판이 생각 난다. 마치 그 길로 접어 들기만 하면 부산인 것 같지만 수백km 떨어진 이정표성내천도 한참 가야 한다



곧게 뻗은 탄천길이다. 가로수 들도 이제 금방 식재가 되어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때 갔었지만 나뭇잎이 빈약하다.



탄천은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근처에 있는 향수산 아래자락에서 발원 하는 것 같다. 어느 열혈 블로거에 의하면 그 발원지를 쫓아 가보니 향수산 아래에 있는 88CC의 저수지가 발원지더라고 한다. 아마도 원해 향수산 아래 계곡이 발원지였으나 컨트리클럽이 들어서면서 그 물이 컨트리 클럽의 연못(88연못)에 모였고 그래서 발원지가 되어버린 듯 하다.

 

가다보면 탄천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참 재미있다. 탄천의 유래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삼천갑자 동방삭의 이야기이다. 다른 문헌에서 보면 백제 시조 온조왕의 이야기도 있고 조선시대에 강원도 등지에서 목재와 땔감을 가져와 탄천주변에서 숯을 구워서 개천물이 검었다고 탄천이라고 했다는 설(출처 : 한국하천협회, 하천과 문화 Vol. 11, 38~39, 정해욱, 도화엔지니어링 전무)도 있다. 어쨌든 공통점은 둘 다 숯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탄천의 순 우리말이 숯내 인 듯 하다.


동방삭 이야기


아주 옛날 옛적에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글자그대로 삼천갑자를 살았으니 얼마만큼 오래오래 살았겠는가를 햇수로 따져보면 약 18만년의 장수기록 보유자로서 이는 천상천하를 막론하고 온 세상에서는 큰 골칫거리가 되었기에 삼천갑자 동방삭을 잡아가기 위하여 계책을 꾸몄으나 워낙 장수한 자인지라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였다.

그래서, 천상의 옥황상제가 동방삭을 잡기로 결심하고 사자를 탄천 부근으로 보내어 탄천에서 숯(목탄)을 씻고 있도록 명령하였다. 왜냐하면 옥황상제는 동방삭이 탄천 방면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자는 옥황상제가 지시하는대로 탄천에서 숯을 씻고 있었는데,냇물에다 숯을 씻으니 물은 자연적으로 검은 물이 흐르기 마련이다.

그때 마침 동방삭이 탄천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이하게도 검은 물이 흐르고 있음을 보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원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탄천을 이리저리 헤매던 중 냇가에서 숯을 씻고 있는 건장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동방삭은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기에 숯을 씻고 있는 사람에게 '왜 숯을 물에씻고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자의 대답은 '숯이 희어지도록 씻는다'라고 말했다. 동방삭은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숯이 희어질 리 없다고 생각하여 '나는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씻어서 희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라고 말하며 크게 웃는 것을 보고 사자가 '이 자가 동방삭이 틀림없구나'하고 그를 사로 잡아 옥황상제께 무릎을 꿇게 하여 드디어 동방삭의 인생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이 내를 '숯내'또는 '탄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출처 : 성남시 탄천이야기


1990년대에 상류의 난개발로 수질이 나빠졌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 생태하천 복원사업을 통하여 현재의 모습과 수질을 가지게 되었다. 어쨌든 지금은 산책하기 아주 좋은 구간이다.



탄천에 대한 설명글을 뒤로 하고 돌아서서 장지천으로 들어간다. 장지천은 이전에 탄천과 마찬가지로 하천 주변이 매우 엉망이었지만 이제는 걸어가는 내내 잘 정비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생각 보다 장지천은 정비된지 얼마 안된 것 같았다. 아울러 아직도 일부 공사는 하고 있기도 하지만 아마 블로그로 정리하는 지금 시점에는 끝나지 않았을까 한다.



뒤로 보이는 장지천은 거의 완벽하게 정비가 된 모습니다.



장지천에 대한 설명판에는 장지동의 지명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었다. 예전에 농업이 중심이었고 인심좋은 동내였다고하지만 뭐 이제는 아파트로 매워진 동내가 되어가는 예전만 하지는 않겠지



장지천에서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파인타운)쪽으로 건너간다. 아파트 사이로 난길을 따라가다보면 장수공원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나온다. 공원위로 가서 잠시 쉬어간다.






장지천에서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파인타운)쪽으로 건너간다. 아파트 사이로 난길을 따라가다보면 장수공원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나온다. 공원위로 가서 잠시 쉬어간다.


















이후는 공원 사잇길로 장지근린공원을 통과해 가는 길이다. 무난한 길에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 동내 주민들이 많이 이용할 듯 하다.




























장지 근린공원을 빠져나오면 문득 거대한 고가도로 밑을 지나게 된다. 외곽순환고속도로 이고 이길을 따라 거여동을 지나 성내천으로 들어간다






성내천은 지금은 인공하천이라고 한다. 원래는 청량산에서 발원해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었는데 하천 70년대에 하천 바닥이 콘크리트로 덮이고 유량부족 등으로 사실상 건천(비가 올때만 물이 흐르는 하천)이었다고 한다. 그뒤에 한강물과 지하철 용출수 등을 인공으로 끌어들여 지금의 하천으로 2005년도에조성하였다고 한다. 뭐 성내천이 청계천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꽤 공을 들인 하천이라 이제는 꽤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여러모로 다양하게 도움되는 수변공간이라고 한다.















성내천에서 잠실에 들어가기전에 하천을 건너서 방향을 바꾼다.









조금가다보면 월남전우백인회라는 간판이 있는 옆길로 들어가면 방이동 생태경관 보전지역이라고 간판이 나온다.












생태경관보전지역 아니랄까봐 방이동에까지 야생멧돼지가 출몰한다고 한다.



방이생태 학습관은 개관을 하고 있었지만 한 코스 더 가야 해서 생태학습관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드디어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






이제 실제 길을 가는 것만 남았다. 힘내서 길을 나선다. 여기까지는 완전 평지다.









큰길을 따라 쭉 올라와서 건널목을 건넌다음 다시 큰길을 건넌다. 건너서 보면 강동그린웨이 일자산 공원 이라는 표지와 함게 일자산 산길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일자산 위에는 둔굴이라는 장소가 있다. 안내문의 내용을 옮기면 둔촌 이집이라는 고려말의 대학자가 고려말 신돈의 박해를 피해 여기에 와서 은거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둔촌이라는 호는 이동내의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둔촌동 근처에는 서울에서 유일한 탄산수가 나오는 약수터가 있다고 한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천연탄산수가 서울에서 난다니 신기 했다. 물론 천연탄산수는 시중에서 판매 하는 것보다 약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못먹는 물인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8년 경에서야 좋은 물이라는게 알려 졌다 한다. (한국의 발견 서울편, 278p)


















일자산 정상이다. 일자산 정상에는 해맞이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정상을 지나 일자산을 내려가기 시작 한다. 









이정표를 잘 보지 않으면 딴곳으로 갈만한 지점이었다.






일자산에서 빠져 나왔다. 일자산을 내려오면 길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큰길을 건너 다시 좀더 가야 했다. 멀리 큰길가로 나선다.
 












길을 건너가니 고덕역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돌아서 가면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길에는 명일 산책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산책길은 생각 보다 높지는 않아도 14km 정도 걸어온 상태에서는 힘이 좀 들었다.



























명일 산책길 끝으로 나오면 고덕역 스탬프 박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것으로 둘레길 완주 성공이다.

 

3구간 전체를 돌아 보면 사실 처음에 그 높낮이가 별 것 없어서 가벼운 산책으로 생각 했지만 역시 길이가 길다는 것은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나를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두버정도로 나눈다면 고덕산 이번 코스를 거꾸로 가는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어쨌던 이로서 3구간을 마치고 전체 둘레길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바로 동행과 함께 조촐히 둘레길 완주를 축하 하며 을지면옥에서 냉면으로 마무리 했다.



둘레길 내용과 돌아본 느낌등을 한번더 정리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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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뤄뒀던 3코스를 시작한다. 3코스는 광진교를 넘어 고덕산일자산을 돌아 수서로 가는 코스다. 3코스는 난이도는 높지가 않은 코스(제일 높은 곳이 해발 80미터 정도) 지만 총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두번에 나누어서 걷기로 했다. 트래킹에 접근성을 고려해서 광나루역에서 고덕역까지 10km구간을 먼저 하고 수서역에서 고덕역까지 코스를 한번에 하기로 했다. 물론 본인이 자신있다면 한번에 가는게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전체 구간은 다음과 같다. 


등산/하이킹
2017. 9. 2. 8:24 AM
소요 시간 3h 35m 12s , 거리 10.7 km
고도 높지않은 길이라 편하게 하시면됩니다. 다만 거리가 조금 기니 유의하세요.
-작성자 black207, 출처 램블러
광나루역에서 광진교 넘어 고덕산 도는 코스
트립의 상세 내용을 보려면 http://rblr.co/VsiR 를 클릭하세요.

8시 반 정도에 일행들과 광나루역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도심구간이라 인기가 없을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둘레길 도는 티가 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광나루역 출구를 나오면 바로 둘레길 안내 표지가 나온다.



표지를 바라보고 좌측으로 깅을 나서서 출발한다. 아침에 모일때 식사하기 좋은 장소였다. 물론 밥은 먹고 왔다. 



가다보면 광진교들어가는 방향으로 광나루 표시가 나온다. 



광진교 들어가는 방향으로 들어간다. 


서울에 한강에 만들어진 3번째 다리라고 하면 제3한강교인 한남대교를 생각 하기 쉽다. 하지만 의외로 광진교가 한강의 세번째 다리이다. 한강철교는 총 4개로 그중 첫번째가 1900년에 만들어 졌고, 그뒤 12, 44, 94년에 만들져서 총 4개가 만들어 졌는데 우선 한강철교가 만들어 졌고 그 뒤에 1917년에 한강 인도교가 만들어 진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잘 알고 있으나 1936년에 광진교가 세번째 다리(철교를 제외하면 2번째)로 만들어 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물론 그쪽 동네에 오래 사신 분들은 아는 일이지만


광진교는 총길이 1,056m의 다리로 처음에 건설될 당시(1936) 일부는 트러스교, 일부는 게르버T형교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누가 설계 했는지 누가 건설했는지 등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만든 이유는 분명했다. 1920년대에는 광진교 근처는 광나루가 주된 교통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는 증기선도 있어서 서울의 동부나 동남부 쪽으로 가는 교통을 대부분 감당 했다고 한다. 1930년 이후로는 늘어난는 교통량을 도선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어 1936년에 광진교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전해 1년전 한강대교가 재건축을 했는데 이때 기존 초기 한강대교에서 사용했던 강재를 가져와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https://namu.wiki/w/%EA%B4%91%EC%A7%84%EA%B5%90)


이후 6.25전쟁시 한강대교와 함께 폭파되었다가 1953년도에 다리교각을 더 만들고 트러스 부분을 없애고 전체를 라멘 게르버교로 만들었고 1980년대부터 노후로 인한 안전문제가 대두 되다가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이후 주민의견 등을 고려해서 전면 철거 후에 현재의 다리로 만들어 지게 되었다. 그 뒤에 걷는 다리로 만들어진 것은 2009년도이다.


언뜻 보면 천호대교와 거의 붙어있어서 처음 서울 생활 할 때 광진교를 보고는 커다란 다리 옆에 조그만한 다리가 있어서 왜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와 여러 굴곡진 경로를 지나온 다리가 그때 그 모습은 아니지만 참으로 걸어본 만한 다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정표를 조금지나면



스탬프 박스가 보인다. 일단 찍고 본다.



광진교 초입에 우측으로 천호대교가 보인다.


천호대교는 광진교 보다 훨씬 뒤인 1976년에 광진교의 노후에 대비하여 새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프리스트레스트콘트리트 교량으로 만들어 졌다. 도로 접속부 일부는 스틸박스이지만 대부분은 PSC이다. 당시 한강에 놓인 PSC는 영동대교 이후 두번째 였다. 하지만 영동대교나 천호대교는 경간장 자체가 50m 수준으로 짧아 미적으로는 전혀 볼 것 없는 다리이긴 하다. 물론 당시 사회가 사회간접 자본의 미적인 부분까지 고려 할 수 는 없었겠지만..


하지만 직후인 80년대가 되면서 개통된 원효대교나 성산대교등을 보면 이미 교량의 미적인 부분에 대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볼수 있다는 것으로 볼 때 계획을 세울 당시인 천호대교나 영동대교의 계획을 세우던 시점인 70년대 초반과 성산대교나 원효대교의 계획을 세우던 70년대 후반의 경제적인 변화는 실로 눈부시다 할 수 있을 듯 하다



광진교 위는 걷기 좋은 길로 만들어져 있다. 



앞에 분들도 아마도 둘레길 도는 분들인 듯...



좌측으로 멀리 구리 암사대교가 보인다.



천호대교 넘어로 올림픽 대교가 보인다.  잠실대교,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광진교 등이 나란히 있는 것으로 봐도 그렇지만 이 쪽 방면의 인구나 교통량은 정말 상당한 것 같다. 



올림픽대교의 꼭대기의 조형물을 보면 항상 헬기 추락 사고가 생각이 난다. 

올림픽대교는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면에서 많은 공을 들여 새운다리이다. 대한민국에 두번째 사장교(첫번째는 진도대교, 1984년)이며 한강위의 최초(1990년)의 사장교(다리상판을 직접 주탑에 줄로 매다는 방식, 현수교와는 다름 참고)이다. 주탑은 총4개의 88미터짜리이고 케이블은 총 24개로 24회 올림픽을 뜻한다. 

하지만 다 좋았는데... 2001년 중앙탑 상부에 불꽃 모양 조형물을 설치하던 치누크헬기가 추락해서 조종사 3명이 전원 사랑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무리한 작업이었다는 논란도 많았고 그 어디에도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안타까운 사고 였다. 



그 뒤로는 롯데의 바벨탑 제2 롯데 월드가 보인다.


지나가는 길에 뮤직벤치가 마련되어 잇었는데 소리가 나진 않았다. 






걷는 다리로 개조된 뒤에 설치된 듯한 화장실이다. 참고 하시길..



광진교 거의 넘어와서는 우측으로 한강둔치로 내려간다. 지나오고서야 알았는데 광진교 밑에 전망대가 있었다는데 입구를 보질 못했다. 살짝 아쉬움... 



광진교 전체 모습이다.



요기서 부터는 약간 지루한 한강변 걷기가 시작된다. 자연스레 빨라지는 걸음을 느낀다.












한참을 가다보면 모형 비행기 날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근처에 소형 무인비행기용 활주로가 있다고 한다. 때마침 누군가 제트기를 날리고 잇었는데 사진 촬영에는 실패...






암사 나들목에서 잠시 쉬어간다.



나들목 건너편에서 동내길로 암사동 선사 유적지 쪽으로 간다.















서울 암사동 유적지는 을축년 대홍수(1925)로 그 존재가 드러난 유적지이다. 이때만 해도 일제에 의해서 특별히 고고학적인 접근이 이루어 지지 않아서 발굴되지 않고 있다가 1967년 유적 발굴조사를 하고, 1971~75년 재 발굴조사를 거쳐 1980년대에 다시 발굴했다. 발굴결과 약 6000년전의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고 지금은 전시관 개보수 중이다









암사유적지를 지나서 조금 더 가면 구리암사대교 밑을 지나서 고덕산 자락으로 올라가게 된다.









언덕을 올라가면 좌측으로 구리암사대교가 보인다. 


구리암사대교는 용마터널과 함께 이용하게 되면 동대문 쪽에서 암사동이나 중부 고속 도로 쪽으로 바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이다. 구리 암사 대교는 구리시 아천동에서 강동구 암사동 쪽으로 연결되면서 명칭을 가지고 지역간 약간의 다툼도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이름 문제보다는 암사대교 북단에 있는 용마터널이 유료터널이라 그 요금 가지고 싸우는게 더 나은 일이 아니었을까?



첫번째 고개를 암사 아리수 센터 정문앞으로 간다. 






아리수 정수센터 앞에서 왼쪽으로 본격적으로 고덕산으로 올라간다.












고덕산은 원래 이름없는 야산이었다고 한다. 솔직히 높이 겨우 200미터도 안되는 산이라 이름이 따로 붙어 있고 거기다가 상당히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어 무슨사연이 있나 했는데 그내용이 고덕산 정상 부근에 안내 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충신인 석탄 이양중공이 고려가 망한뒤에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이곳 산자락에 은둔하면서 후일 인근 사람들이 덕이 높다고 고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고덕산 정상을 지나 고덕역쪽으로 내려간다. 화장실이 없어서 여기서 부터 발걸음이 빨라 졌다. ㅠ.ㅠ











































































고덕역에 근처에 도착 도장을 찍고 지하철로...









고덕산 구간은 전반적으로 매우 평탄한 길이다. 한강을 건너와서 한강공원을 나서면서 부터는 화장실이 없으니 한강공원에서 화장실은 반드시 거쳐서 나올것을 추천한다. 아주 혼쭐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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